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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퀘스트

  • 안일범 기자 nant@khplus.kr
  • 입력 2020.12.01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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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의 시초를 거슬러 올라가면 TRPG이야기가 나온다. 펜과 종이, 주사위를 두고 대화로 풀어 나갔던 RPG가 모태란 해석이다.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TRPG를 컴퓨터로 옮긴 장르를 CRPG라 불렀고, RPG모태가 됐다.  

이어 인터넷을 만난 RPG는 또 한번 진화한다. 한명과 컴퓨터가 즐기던 게임에서 이제 여러 명이 한데 모여 즐기는 시대를 맞이하면서 MMORPG가 된다. 놀랍게도 초기 MMORPG도 따지고 보면 TRPG와 CRPG에서 유래했던 시스템이 근간이다. 그도 그럴것이 MMORPG개발자들이 CRPG개발자였으며, TRPG를 즐겼으니 공통 분모를 발견하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 없다.

초기 MMORPG에서 퀘스트는 ‘대화 지문’형태로 등장했다. 유저가 찾아가 NPC에게 말을 건면 NPC는 구구절절 이야기를 털어 놓는다. 이야기를 잘 들어 보면 힌트가 숨어 있고, 유저는 이 힌트를 찾아가 퀘스트를 풀어야 한다. 물론 ‘힌트’는 ‘철저히 숨겨져’있다. 특정 지역에 뭔가가 목격됐다는 내용이면 그나마 친절한 수준. 대신 밤에 등장하는지, 낮에 등장하는지. 무슨 먹이를 놔야 등장하는지 따위 조건들은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

사막에서 바늘찾는 것처럼 일단. 맵을 샅샅이 뒤져가면서 조건을 충족시키고 행운을 얻기를 기대할 수 밖에. 게이머들은 서로 질문해가면서 해답을 찾아내고 결국 퀘스트를 클리어 하기도 했다. 그나마 퀘스트를 수행하는 유저들은 사정이 나았다. 대다수 유저들은 퀘스트가 존재하는지 조차 모른다거나, 누군가 알려줘야만 이해하고 따라가는 상황이 빈번했다.

그렇다보니 퀘스트 시스템 속에 ‘반응형 지문’을 집어 넣어, 글씨를 클릭하면 힌트를 출력하는 것과 같은 시스템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와 같은 게임에 들어서야 ‘퀘스트’를 인지하고, 수행하는 시대가 열렸다. 이어 ‘길 찾기 시스템’, ‘내비게이션 시스템’이 생기면서 이제 누구나 즐겁게 퀘스트를 즐길 수 있는 시대가 왔다.

편한 ‘시대’가 계속돼서일까. 한 때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이 ‘편한’ 시스템이 불만이다. 좀 더 난이도가 어렵게, 누구도 쉽게 플레이하지 못하는, 소위 ‘유니크 퀘스트’를 원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 소위 CRPG를 개발했던 게임업계 고인물들은 대화형 퀘스트를 구현한다. 게임 내 인공지능 NPC를 배치하고, NPC와 잡담을 나누다 보면 힌트를 툭툭 던지는 식이다. 짐작했겠지만 게임은 쫄딱 망했다. 유저들은 퀘스트를 두고 ‘재미 없다’고 표현했고 ‘귀찮다’고 표현했다. ‘우리가 원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는 말을 남긴 채 떠났고, 개발자는 프로젝트를 갈아 엎었다. 특히 유저 중 몇몇만 즐기는 콘텐츠기 된다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항의가 빗발쳤다. 

상대적으로 ‘형평성’이 중요하지 않은 콘솔 게임들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나간다. 이제는 인게임 컷신과, QTE 등을 도입해 소위 ‘연출’을 강화한다. 여기에 유저들이 선택하는 방향에 따라 다른 결과를 도출하는 시스템이 각광을 받는다. 억울하게 스파이로 의심받는 충신을 살렸더니 진짜 스파이여서 왕을 암살하는 스토리가 나오기도 하고, 반대로 스파이를 죽였더니 왕이 주인공을 감옥에 가두는 진행이 나오는 식이다.

짧게 보면 게임은 제자리 걸음이다. 비슷한 게임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시야를 좀 더 넓혀서 5년, 10년단위로 바라본다면 게임은 분명히 발전하고 있으며, 개발자들은 지금도 미치도록 새롭고 싶은 욕망을 표출하고 있다. 그들을 믿고 기다려 준다면, 언젠가는 게이머들이 원하는 ‘인생 게임’을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경향게임스=안일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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