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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도둑질의 기억

  • 안일범 기자 nant@khplus.kr
  • 입력 2021.01.05 16:00
  • 수정 2021.01.05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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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PG를 최초로 시도 했던 리차드 게리엇은 ‘울티마 온라인’을 선보이면서 새로운 캐치 프라이즈를 선보인다. 그들은 ‘WE CREATE WORLD(우리가 세계를 만든다)’는 말로 자신들의 가치관을 설명 했다. 새로운 게임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들이 만드는 게임 속에서 캐릭터들은 살아 숨쉬며, 각자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행동하도록 설정했다. 지난 1994년 발매된 '울티마8'을 보면 이들이 세계를 만든 틀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틀의 핵심은 바로 사람에 집중하는 것.  게임 속에 등장하는 NPC들은 각 캐릭터 별로 24시간 스케줄을 지닌다. 각 조건에 맞춰 세팅돼 있다.  

일례로 상점 주인은 오전 7시부터 밤 6시까지 일을 한다. 해가 지면 상점을 정리한뒤 문을 닫고, 뚜벅 뚜벅 걸어가 근처 자기 집으로 들어 간다. 아침 6시가 되면 일어나서 주변을 산책한 뒤 밥을 먹고 상점으로 돌아 오는 스케줄이다. 27년전 일이지만 지금도 이를 기억하는 이유가 있다.  

게임을 플레이하다가 돈이 없던 기자는 검과 갑옷을 갖고 싶었다. 상점에서 구매할 수 있는 칼은 120골드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 게임에서는 돈을 수급할 방법이 쉽지 않다. 아무 집에 들어가 상자를 열고 돈을 줍는 순간 목격자들이 경비병을 부르고 말 그대로 머리가 뎅겅 썰린다. 몸이 토막나는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 하다 보면 더 이상 뭔가를 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돈을 모았다.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시선을 피하고 물건을 집기를 반복하면서 돈을 모은다. 당시 NPC들의 눈을 피해 집안 전체를 뒤져 봐야 10골드를 벌기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기자는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선다. 이럴 거면 차라리 물건을 훔치면 되지 않을까.

기자는 상점으로 돌격한다. '울티마8'에서 물건을 훔치려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치밀하게 계획해야 한다. 상점에 들어간 뒤 NPC행적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오랜 기간 동안 이리저리 물건을 만지는 듯 하던 NPC가 어느 순간 밖으로 나가는 장면을 포착한다. 시야에서 벌어진다면 신고도 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목이 뎅겅 잘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기회는 있다. 짧은 순간 동안 밖에 나갔다 돌아오는 NPC. 항상 고정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 타이밍을 노려야 했다. 이제 주구장창 상점에 서서 NPC행동을 살핀다. 몇 시간 동안 여러번 반복되는 패턴을 파악했다. NPC가 밤 6시 문을 닫고 나가려는 타이밍 직전에 상점에 들어와, 물건을 닥치는데로 집어 넣고 반대편 문으로 달리는 시도를 한다. 아뿔싸. 문을 열고 나가는 듯 했던 NPC가 그대로 돌아 오더니 목이 뎅겅 잘린다. 실패다. 그렇다. 욕심이 과했다. 물건을 죄다 담으려는 시도가 문제였다. 몇 번이나 시도 끝에 드디어 칼 한자루를 훔칠 수 있었다. 경비병이 나타날새라 미친듯이 달렸다. 그리고 저장 버튼을 누르는 순간. 그 어떤 게임에서도 찾지 못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이 순간이 한 소년의 인생을 바꿨다. 

그렇다고 해서 기자가 대도가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자는 다른 사람들의 물건을 도둑질 하지 않는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물건들도 내 것이 아니면 줍지 않는다. 내 것도 귀찮아서 줍지 않는 마당에…. 각설하고, 물건을 훔쳤던 기자는 이제 게임 공략을 담당한다. 사소한 물건도 지나치지 못하는 몸(?)이 돼 버렸다.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게임. 독자 여러분들이라면 만들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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