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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블랙북’, 구 소련 세계관 기반 다크 판타지에 ‘전율’

‘퀜트’, ‘슬더슬’ 떠오르는 덱빌딩 카드게임 … 슬라브 신화 근간 스토리텔링 ‘매력 포인트’

  • 안일범 기자 nant@khplus.kr
  • 입력 2021.09.03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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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령 805호 기사]

1879년 구소련 연방. 젊은 여성은 우리 표현으로 ‘신기’가 들렸다. 흑마술서로 보이는 검은 책에 사주를 받아 여행을 떠난다. 표면적 목표는 흑마술서에 걸린 7개 봉인을 푸는 것. 그렇게 여성은 마녀가 됐고, 마녀는 봉인을 풀기 위해 정처 없는 여행을 떠난다. 마녀 뒤에는 초트(악마)가 함께한다. 초트는 때로는 아군으로 함께 활동하지만 동시에 온갖 유혹과 협박, 시련을 통해 마녀를 타락시키려 하기도 한다. 처절한 상황 속에서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면 타락한 마녀에게도 구원의 빛이 내려올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어둡지만 아름다운 배경 속에서 잔혹하지만 유머가 살아숨쉬는 아이러니가 매력적인 게임 ‘블랙북’을 만나 보자.
 

 

슬라브 신화 속으로
1800년대 후반 구소련 연방 지역은 사실 다년간 언급조차 터부시 되던 지역이다. 이데올로기 대립과 전쟁 등으로 인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역. 그러나 입에서 입을 통해 전해진 민담과 전설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 가톨릭과 무속 신앙, 이슬람과 인도 신앙 등 다양한 지역에서 엿보이는 신화들이 복합적으로 표현되면서도, 또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들이 살아 숨쉬면서 최근 다시 한번 복원되는 세계다. 이를 기반으로 게임화한 ‘블랙북’은 철저한 고증과 조사를 거쳤고 당시 시대 상황과 정서들을 그대로 녹여내 표현했다. 
 

▲ 슬라브 세계관을 기반으로 독특한 그래픽 스타일과 분위기를 뿜어 낸다

러시아쪽 평가들은 이 개발자의 고증 능력에 극찬을 보내는 분위기다. 반대로 한국에서 게임을 리뷰하는 기자는 모든 내용들이 낮설기만 하다. 다른 면에서 보면 이 게임이 표현하는 스토리텔링 기법과 주제들은 일반적인 표현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사람 사는 곳 어디든 비슷한 면이 있기 마련. 시대와 사고 방식이 조금 다를 뿐 원론적 관점에서 접근하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주제들이 게임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온다. 블랙 유머속에 튀어 나오는 촌철살인급 멘트들은 스토리텔링을 완성하는 조미료 역할을 한다. 얼핏 비슷해 보이는 게임에 배경을 바꾸자 전체 게임이 생명력을 얻은 케이스다. 

덱빌딩 게임의 재미
초반 게임은 단순한 덱빌딩 게임으로 출발한다. 블랙북에 내재된 카드들을 활용해 공격과 방어를 하면서 게임을 플레이 해 나가는 식이다. 봉인을 한 개 푸는 순간 새로운 카드들이 등장하며, 게임역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마주하는 적들 역시 새로운 카드와 패턴들을 가동해 유저들과 맞서 싸운다. 봉인이 풀릴 때 마다 게임 스타일이 변하기에 후반까지 덱빌딩과 카드 배틀의 힘이 유지되는 편이다. 기본 전투구도는 캐릭터 공격력이나 방어력을 강화해 스택을 쌓고 적 공격을 버티면서 살아남는 형태로 전개 된다. 전반적인 카드 성능이 적군 보다 나은 편이기 때문에 보다 빠르게 스택을 쌓을 수 있어 유저들이 유리한 구도가 성립돼 있다. 그러나 타이밍이 맞지 않는 다면 역시 일반 역전 패배를 당할 수 있는 점이 변수. 
 

▲ 봉인된 악마들과 카드 배틀로 전투한다

문제는 게임 세이브 시스템이 이상해 ‘죽기 직전’에만 세이브가 가동되도록 돼 있다. 자칫 실수하면 장시간동안 게임을 다시 플레이해야 한다. 이를 잘 관리해야만 게임을 여유롭게 풀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플레이타임이 오히려 단점?!
게임은 장시간동안 즐길거리를 제공한다. 매력적인 스토리라인을 기반으로 게임이 전개되다 보니 오히려 전투가 거추장스러운 면이 있다. 간단한 고민만 하면 전투는 쉽게 해결되며, 최고 난이도로 플레이하더라도 적들은 너무 쉽다. 오히려 덱의 성능을 완벽하게 발휘하지 못하는 점이 감질맛이 나는 설계다.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개발사는 미니 게임을 준비해 일종의 퍼즐 형태 게임플레이를 제공한다. 매 케이스에서 특정 카드를 순서대로 내는 형태를 추구한다. 이 점이 재미 요소로 작용하기 보다는 부담스러운 구조인데, 소위 ‘답’은 정해져 있으니 카드를 내보라는 형태로 몇 번이나 반복하고 도전하다 보면 쉽게 지치는 구조다. 
 

▲ RPG처럼 능력을 강화하고 장비를 모으는 콘텐츠도 포함돼 있다

흔히 개발자들이 하는 실수로, 전반적인 난이도를 낮춰 대중들의 인기를 사로잡고자 하지만 결국 다수 게이머들이 지루하게 느끼는 방향으로 게임을 전개한 셈이다. 이를 보완하는 장치는 형편없다 보니 옥의 티가 됐다. 
게임은 총 30시간이 넘는 플레이타임을 제공하며, 부가적으로 러시아 문화 사전과 같은 콘텐츠들을 제공하는 등 꽉 채운 콘텐츠를 내세운다. 그러나 대다수는 곁가지로 크게 필요 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차라리 약 15시간에서 20시간 규모로 압축한 게임을 선보였다면 유저들의 평가는 좀 더 높지 않았을까. 

스토리텔링을 중요시한다면 ‘도전’
정리하자면 게임은 덱빌딩 게임의 탈을 썼지만 알고 보면 비주얼 노벨에 가까운 콘텐츠다. 충실히 설계된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그래픽을 입혀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하는 개발자의 욕망이 여실이 엿보인다. 그 과정에서 애정을 넘어 집착에 가까운 설계는 극찬을 받아 마땅하다. 좋은 소재를 찾아서였을지도 모른다. 단, 이 좋은 소재를 풀어내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 차라리 평범한 턴제RPG나 포인트앤 클릭 어드벤쳐였다면 이야기가 달랐을지도 모른다. 독특한 배경을 보이는 게임을 좋아하는 유저, 철학적 질문과 선택 및 결과에 따른 변화를 선호하는 유저, 읽을 거리가 많은 게임을 선호하는 유저들에게 게임은 돈이 아깝지 않은 재미를 선사한다. 반면, 덱빌딩 게임으로 카드를 모으고 독자적인 전술을 개발하고자 하는 유저들이라면 이 게임은 실망을 안겨줄 것이다.

 

[경향게임스=안일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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