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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의 지갑

  • 편집국장 김동욱 kim4g@kyunghyang.com
  • 입력 2007.12.31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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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노인이 백발을 휘날리며 볼링공을 힘차게 던진다.
몇초가 지났을까. 한꺼번에 쓰러져버리는 볼링핀을 보며, 노인은 외쳤다. "스트~라이크~"  그의 옆에는 아내인 듯한 노부인이 연신 박수를 치고 있다.


그러나 백발노인의 오른손에는 하얗고 길쭉한 TV리모콘 같은 게 들려있었다.


그들은 실제 볼링을 한 게 아니었다. 닌텐도가 발매한 신형 가정용 게임기 Wii의 스포츠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인의 표정은 실제 볼링에서 스트라이크를 친 것 이상의 만족스러움이 역력하게 묻어나는 듯했다.


닌텐도의 차세대 게임머신 Wii가 미국의 노인층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다고, USA투데이가 최근 보도했다.
"50세 이상의 노년층에게 Wii의 보급률은 폭발적"이라고 닌텐도 미국법인의 조지해리슨 부사장은 말하고 있다. Wii의 높은 보급률에는 닌텐도의 '다가서는 전략'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닌텐도는 미국 전역의 노인정과 같은 장소에 무상으로 Wii를 설치했다. 이곳에서 우선 플레이해 보고 재미가 있으면, 집에서 구입해 손자들과 함께 놀아보라는 것. 초기 보급비용이 큰 부담이 됐지만, 이 전략은 보기 좋게 성공했다.
코네티컷주의 옥스퍼드에 사는 스테판 할아버지는 "만약 Wii가 없었다면, 나의 여생은 너무 재미없었을 겁니다. 평생동안 게임을 해본 적이 없지만, 뒤늦게 게임의 재미를 알았습니다. 이제는 나같은 노인도 게임뿐 아니라 첨단 테크놀로지 기기들을 손쉽게 쓸 수 있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노인들이 Wii를 선호하는 것은 단순히 재밌다는 이유만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안전하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실제 볼링이나 테니스, 야구, 복싱 같은 스포츠는 노인들에게 다소 부담이 되는 것이 현실이다. 자칫 잘못하면 큰 부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Wii 컨트롤러를 이용한 플레이는, 간단한 동작으로도 실제 스포츠에 버금가는 액션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현지 유력 리서치 기관의 발표에 따르면, 미국의 노년층은 2006년 한해동안 3500조원의 수입이 있었으며, 그 중 2100조원 정도의 구매력을 갖고 있다고 예측하고 있다. 자식들을 모두 결혼시키고, 노후연금을 받으며 부동산 등의 수입이 꽤 많지만, 이 노년층이 구매할 만한 상품이나 서비스가 부족했던 것이다.


슈퍼마리오로 시작된 패미콤 붐은 이후 조작 버튼이 많아지면서, 나이든 유저들을 점점 떠나게 만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Wii의 직관적인 인터페이스, 그야말로 스포츠의 실제 모션만을 흉내내면 되는 손쉬운 조작은 다시 노년층을 불러모으고 있다. 


2년반 전쯤의 일이다. IMC게임스의 김학규 대표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라나도에스파다를 완성한 후에 어떤 게임을 만들고 싶으냐는 필자의 질문에 꽤 의외의 답변을 내놨다. 
“저희 어머니 같은 세대들도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노인용 게임을 만들고 싶습니다.”라고 말이다. 왠지 황당한 답변 같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는 그때부터 이미 게임 소비층의 블루오션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겨울방학을 맞아 무수한 온라인게임들이 쏟아지고 있다. 다양한 장르와 각양각색의 게임시스템, 게다가 수억원대의 경품들이 아낌없이 살포(?)되고 있다. 그 게임들이 타게팅하고 있는 모든 지향점은 10대와 20대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우리 업계의 현실이다. 할배, 할매들이 끼어들 게임은 어디에도 없다.


지름길을 바로 옆에 놔두고, 먼 길을 빙빙 돌아가고 있는 형국이다. 물론 그들을 유혹하기 위해서는 닌텐도의 Wii처럼 파격적인 인터페이스와 기획이 필요하다. 그러나 노년층 공략의 시작은 굳이 컴퓨터게임일 필요는 없다. ‘젠가’같은 보드게임이라도 충분하다.


파고다공원에서 장기를 두고 있는 할배들과 구석방에서 화투를 치는 할매들을 불러모을 만한 기발한 아이디어의 게임이 절실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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