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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를 사랑한 소년

  • 편집국장 김동욱 kim4g@khplus.kr
  • 입력 2012.08.02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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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시내라곤 하지만, 도심에서 조금은 벗어난 변두리에 살고 있었다. 1970년대는 고속 성장을 이뤄낸 회색빛이 일본을 상징했지만, 소년의 동네에는 푸르른 자연이 꽤 남아 있었다. 그는 산과 들을 뛰어다니고 냇가에서 물놀이도 했다. 전쟁이 끝난지 오래됐지만 동네에는 방공호의 흔적과 폐허들이 남아 있었다. 소년은 이 곳에서 벌레들과 친해졌고 녀석들을 좋아했다.


생물 시간에 배운 곤충을 직접 관찰하며 채집하기를 즐겼고 병속에 넣어 직접 기르기도 했다. 소년은 반 친구들에게‘곤충 박사’라 불렸다. 소년이 중학생이 되자 동네에도 개발의 바람이 불었다. 뛰어놀던 자연의 모습도 조금씩 변해갔고 그의 친구(벌레)들도 점차 자취를 감췄다. 그 즈음 동네 어귀에는 오락실이 생겼다.


유일한 관심사였던 곤충과 멀어져 꿈을 잃어버릴 순간에 그를 구한 것이 게임이었다. 소년은 이번에는 게임에 푹 빠져 버렸다. 얼마되지 않던 용돈을 오락실에 고스란히 갖다바쳤다. 이번에는 ‘오락실의 난동꾼’이란 별명을 얻었다. 1983년 도쿄 공업고등학교 진학한 소년은 그간의 게임 플레이 경험을 살려 게임 공략 동인지 ‘게임프리크’를 혼자 써냈다.


당시에는 게임 공략본도 없었던 때라 그의 조잡한 책자는 동인지 매장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어느날엔가는 만화가 지망생이라며 자신을 찾아온 한 청년과 의기투합했다. 공략본은 일러스트까지 갖춰진 그럴 듯한 형태로 발전됐다. 동료들은 점점 늘어났고, 소년은 게임 개발 콘테스트에 출전해 최우수상을 타기도 했다.


한 분야에 열중하게 되면, 다른 것에는 관심도 두지 않으며 대체로 사교성이 부족한 사람을 ‘오타쿠’라고 부른다. 사실 상 마니아와는 또 다르게 부정적 의미가 부각된 단어다. 벌레와 게임에 빠져 학창시절을 보낸 이 소년이야말로 오타쿠의 전형이다. 놀라움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 소년이 바로 21세기에 길이 남는 세계적 캐릭터 ‘포켓몬스터’를 창조해낸 ‘다지리사토시’다.


포켓몬스터는 닌텐도가 1989년 처음 발매한 휴대형 게임기 ‘게임보이’용 소프트였다. 특이한 것은 슈퍼마리오, 동키콩 등 닌텐도의 히트작들과는 달리, 게임프리크라는 외주 회사가 캐릭터와 플레이 방식 등을 기획해 닌텐도에 공급한 게임이었다. 다지리사토시는 당시 휴대게임기로 선풍적 인기를 모으던 게임보이의 특성을 깊이 연구해 포켓몬스터의 기획안을 닌텐도에 제출했고, 깐깐하기로 유명한 닌텐도의 높은 허들을 통과했다. 벌레를 사랑한 소년의 아이디어는 1996년, 드디어 세상의 빛을 보게됐다.


포켓몬스터는 게임뿐 아니라 다양한 OSMU(원소스멀티유즈)상품으로 파생됐다. 1999년 미국 전역의 극장가를 강타한 극장판 ‘포켓몬:더 퍼스트 무비’는 8,570만 달러(우리 돈 970억원)의 놀라운 흥행기록을 세웠다. 포켓몬스터와 관련된 게임은 이미 전세계에 3억개가 넘게 팔렸으며, 애니메이션은 70여개국에서 방영됐다. 포켓몬스터라는 단일 캐릭터의 시장 규모가 20조원을 훌쩍 넘는다고 하니 뭐라 할 말이 없을 정도다.


벌레와 게임에 푹 빠져 살았던 오타쿠 소년이 한마디로 대형 사고를 친 것이다. 그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세상 사람들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아이디어들이 그의 머리 속에서 끊임없이 샘솟고 있었던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포켓몬스터의 아버지 다지리사토시. 그로 인해 지금까지 부정적 이미지로 취급당했던 오타쿠는 이상한 존재가 아닌 세상에 없던 것을 창조하는 혁신적인 사람이라 불리워야 할 것이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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