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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게이머의 죽음

  • 편집국장 김동욱 kim4g@khplus.kr
  • 입력 2012.10.18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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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긴장한 모습의 남자는 컴퓨터 앞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채팅을 하고 있었다. 오래 전 연합 길드 시절의 동료였던 미타니와 그를 아는 몇몇 사람들은 걱정스러운 듯 그에게 안부를 물었다. “오늘밤 우리는 절대 죽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이 건물을 호위하는 경찰관 한 사람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걸 봤어”라고 그는 채팅창에 글을 써내려갔다.


그리고 몇분이 흘렀을까. “총소리가 점점 가까워 오고 있어”라는 문장을 끝으로 그의 접속이 끊어졌다. 그를 걱정하던 길드 동료들은 친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걸 직감했다. 이튿날, 2012년 9월 13일자 조간 신문에는 ‘리비아 미국영사관, 현지 무장세력의 로켓포 공격으로 대사 등 직원 4명 사망’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1면 톱에 실렸다.


신문을 받아든 미타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어제밤, 로켓포 공격을 받기 직전까지 게임 내에서 채팅을 했던 사람은 그의 가장 친한 길드원 ‘숀 스미스’였다. 숀 스미스는 해군 출신 정보관리관으로 사담 후세인 체포 후인 2007년에 바그다드에 부임해 때때로, 길드원들과의 채팅에서 “또 곡사포를 쏘고있다”라며 현지 상황을 생중계한 적이 많았다.


가끔은 전황을 전하는 채팅 도중 갑자기 없어져, 며칠동안 게임 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도 했다. 이날 채팅방에서 일부 길드원들은 “또 없어졌다. 그렇지만, 며칠 지나면 다시 접속할거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숀 스미스는 올해로 서비스 10년째를 맞는 MMORPG ‘이브온라인’의 핵심 유저였다.


이브온라인 게임 내 군스왐(Goonswarm) 연맹에서 베일 랫(Vile Rat)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했던 그는 연맹 창설 이전부터 게이머들을 결집시키는 영향력을 가진 몇 안되는 멤버 중 한 사람이었다. 특히 게임 내에서 외교 능력이 출중해, 여러 세력들간의 분쟁을 중재하고, 손잡게 하는 등 막후 조정자의 역할을 빈번하게 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40만명에 이르는 이브온라인 유저들 중‘베일 랫’이라는 닉네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니 그가 얼마나 커뮤니티 활동을 열심히했는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민감한 정보를 다루는 외교관의 입장이기 때문이었을까. 이브온라인에서 매일 만나는 친한 게이머들에게도 자신의 정체에 대해 말하는 법이 없을 정도로 철저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사건 발생 후 한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브온라인의 관련 커뮤니티에서는 고작 34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를 애도하는 추모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리비아에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미국 외교관들의 추모행사에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숀 스미스의 온라인게임 경력을 이렇게 언급했다.


“고인은 이브온라인에서 베일 랫이라는 닉네임으로 게임 내 외교관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으며, 게이머들을 대변하는 단체인 CSM에 소속돼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그는 이 세상뿐 아니라, 가상 세계에서도 모두에게 사랑받았습니다” 만일 비슷한 사건을 우리나라가 당했다면, 외교통상부 장관이 추도사에서 과연 고인의 게임 경력을 언급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일부 무지한 언론이 톱기사에 이런 제목을 달지도 모르겠다. 현지 대사관 직원, 피습 직전까지 게임에 몰두 ‘기강 해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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