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조이온」 조성삼 회장 “최대 자산은 글로벌 인적 네트워크 구축”

  • 소성렬
  • 입력 2004.05.03 18:29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88년이었다. 군대 제대후 복학을 했던 어느날이었다. 동생(조성용 사장)과 장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도 사업을 해볼까’라는 화두가 튀어나왔다. “사업.” “그래 사업.” “어떤 사업이 좋을까.” 형제는 그날부터 고민에 들어갔다.

어떤 사업을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으로 몇날며칠을 보냈다. “결정했다.” “IT 관련 산업이 좋겠지.” “그래 컴퓨터 관련 사업을 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의기투합한 형제는 자금 모으기 위한 방법을 찾아 고민했다.

“일단은 사업 계획서를 만들자.” “그래야 겠지. 그래야 사업 밑천을 확보할 수 있지.” “얼마면 될까. 한 2억.” “아니야 적어도 3억은 있어야지.” 형제는 사업계획서를 정성들여 만들었다.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사람들을 만났다. 집에서 알면 용서하지 않는다. ‘대학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무슨 사업이냐’고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모든 것은 비밀리에 진행해야 했다.

우선 재력이 있는 친구 아버지 두 분을 만나기로 했다. 무조건 설득을 하고 받아내야 했다. 사업계획서를 들고 설득에 들어갔다. 사업계획서가 마음에 드셨는지 흔쾌히 1억을 투자하겠다는 대답을 하셨다. 또 다른 친구의 아버님도 1억을 투자하겠다고 하셨다.

2억이 확보됐다. 나머지 1억이 문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은 용산에 점포를 확보하자. 2개를 얻었다. 일단은 저질러 보고 나머지 1억을 아버지에 부탁하기로 했다.

전후 사정 이야기를 들으신 아버지는 두 아들의 집념에 두손을 들었다. 나머지 1억이 확보됐다. 사업이 시작됐다. 회사이름은 ‘샘전자’. 당시 일본의 파나소닉과 소니가 소유하고 있던 8비트컴퓨터 ‘MSXⅡ’에 대한 라이선스를 확보했다.

‘MSX’ 기종은 일본을 기반으로 한 기종으로서 팩(Pack)이라는 게임 전용기에 일반화된 인터페이스를 갖추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돈 버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8비트 컴퓨터가 16비트로 바뀌어 버렸다. 어렵게 확보한 ‘MSXⅡ’에 대한 미련을 접어야 했다. 첫 번째 시련이었다.

그렇다고 사업을 접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플로피디스크를 수입했다. 약 10만장 정도였다. 그런데 수입가격 보다 용산에 깔리기 시작한 플로피디스크 가격이 더 저렴했다. 각종 희귀한 플로피디스크가 많았지만 수익성이 맞지 않아 ‘아프로만’이라는 회사에 헐값에 넘겼다. 두 번째 시련이었다.||“우린 젊잖아. 다시 시작하자.” “그래 뭐든 방법이 있을거야.” 형제는 전열을 가다듬었다. 89년 IBM 컴퓨터를 조립해서 팔기 시작했다. 당시 비디오 게임기로 각광을 받던 메가드라이브의 롬펙에 들어가는 마스킨롬이라는 칩을 생산해 하이콤에 넘기는 사업도 병행했다. 게임과 연을 맺게된 계기가 됐다.

서서히 샘전자가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사업 성공이었다. 91년 일본에 발매된 PC게임을 수입해 유통하기 시작했다. 쌍용의 전자사업부에서 연락이 왔다. 함께 게임 사업을 해보자는 제안이었다. 샘전자는 게임사업부를 독립시켰다. 소프트넷. 게임사업부가 독립하고 난 뒤 루카스아츠의 게임들을 수입했다. 약 1만장이 팔렸다.

92년부터 본격적인 퍼블리싱 사업이 시작됐다. 1년에 30여개의 타이틀을 들여왔다. 92년부터 게임 개발이 시작됐다. 해외퍼블리싱망 구축에 들어간 것도 이때부터다.

샘전자는 조립식 PC의 대명사였다. 샘전자에서 조립된 PC를 사용해 본 서울대 공과대생들의 적극적인 권유로 이 대학에서 공동구매 판매권한을 따냈다. 94년 전국의 공중보건소 남품권한도 따냈다.

조 회장은 납품을 위해 1일 8백km의 거리를 봉고차로 돌았다. 사업은 의외로 승승장구 했다. (주)샘전자, 샘시스템 등 자회사도 설립됐다. 그러던 94년 3월 28일. 자금회전이 안돼 30억원의 부도가 났다. 얼마 안 있어 20억원의 부도가 또 났다. 95년 3월 2일 3억만 갚으면 됐다. 7천만원이 모자랐다. 샘전자와 (주)샘전자는 결국 문을 닫았다. 샘시스템만 남았다. 세 번째 시련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포기 할 수는 없었다. 사업 재기를 위한 아디디어를 짜냈다. 그동안 친하게 지내왔던 사람들은 외면을 했다. 앞길이 막막했다. 그러던 어느날 THQ의 수석부회장인 티머시에게 돕겠다는 연락이 왔다. 조 회장의 신용을 높이 평가했다.

96년 9월 14일 한국라이센싱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4번째 도전이었다. 재기를 했지만 자금이 충분치 않았다. 신용 카드를 여러장 만들어 현금 서비스로 돌려 막기를 했다. 97년 미리내소프트의 제품을 사서 해외에 수출을 시작했다. 해외의 제품 30여개를 들여왔다.

98년 IMF가 왔다. 여기에서 더 물러날 수 없다. 유통시장의 붕괴로 한국라이센싱도 위험에 처했다. 유통라인을 잡지 못한다면 사업도 절망이었다.

서점이 눈에 들어왔다. 발로 뛰면서 전국의 서점을 잡기 시작했다. 1년동안 7천개의 서점 유통망을 구축했다. 지금도 당시 연을 맺었던 서점 주인들과 연락을 주고받을 만큼 신용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신용 때문인지 무난히(?) IMF위기를 극복했다. ||99년 한국라이센싱 게임 사업부 감마니아코리아를 설립했다. 자본금 36억짜리 회사였다. 온라인 게임 개발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사업을 해오면서 느꼈던 점 중 하나가 너무 앞서가면 실패 요소가 그만큼 많다는 사실이었다.

2001년 9월 감마니아코리아를 조이온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온라인 게임 개발도 이때 시작 됐다. 조이온이라는 이름으로 출발 한 뒤 나온 첫 번째 온라인 게임이 ‘임진록 온라인 거상’이었다. 2003년 한국라이센싱은 멀티플러스엔터프라이즈로 사명을 변경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시작한 사업은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게임과 함께 해온 16년은 저에게 큰 보람이었습니다. 사업을 해오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점은 글로벌 인적 네트워크 구축이었습니다. 또 사업을 하면서 배운 철학이 있다면 ‘이 세상은 더불어 사는 것이지 혼자 힘만으로 살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조이온이 그동안 축적해온 글로벌 인적네트워크를 이용, 국내 게임산업이 조금이나마 발전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조성삼 회장이 인터뷰 말미에 강조한 말이다.

사진=유영민기자|youmin2001@kyunghyang.com

저작권자 © 경향게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