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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용] 영등위 위원장

  • 소성렬
  • 입력 2002.07.09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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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용 위원장은 영등위 위원장이라는 직함보다 영화 예술인으로 더 유명하다. 김 위원장은 지난 1958년 국방부 정훈국 소속 육군 대위라는 직책으로 군 영화를 제작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같은 부대 대위로 재직중이던 소설가 선우 휘씨는 김 위원장이 영화 감독으로서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영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후 군인 신분으로는 만들 수 없는 영화를 군 영내가 아닌 밖으로 나가 제작을 했다. 이때 만든 작품이 김 위원장의 데뷔작인 ‘공처가’였다. 당시 상황으로서는 군인 신분으로 영화를 만든 다는 것은 상상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선우 휘씨는 김 위원장의 탁월한 영화 연출 능력을 믿고 특별히 배려를 했다. 김 위원장은 이후에도 군인 신분으로 ‘삼인의 신부’ ‘구혼 결사대’ 등 두 편의 희극 영화를 비밀리에 제작했다.
그는 “당시 시대 상황이 암울했기 때문에 희극 영화를 제작하는 것 밖에는 생각 할 수 없었다”며 배경을 설명했다. 이때 그의 나이가 29살. 8년여에 걸친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한 뒤 김 위원장은 68년까지 30여편의 영화를 찍었다. 한편의 영화가 끝나면 또 한편의 영화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일 영화를 찍었습니다. 쉬임 없이 영화 제작 현장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너무나 큰 행복이었습니다.” ||초기 희극 영화를 찍던 김 위원장은 영화의 맛을 알게 된 후 문학 작품에 대한 영화에 매료 됐다. ‘영화와 문학의 접목’. 김 위원장은 이를 위해 영화 감독으로 인생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국·내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만을 고집했다. 그가 처음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은 ‘여자의 일생’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작가 모파상의 ‘첫 사랑’ 이었다. 이후 문학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작품은 30여년 동안 그가 만든 109편의 작품 중 50여편에 다다른다.
현진건의 ‘무영탑’, 이광수의 ‘유정’, 김유정의 ‘봄봄’, 이효석의 ‘분녀’,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네’, 김동리의 ‘까치소리’, 최인호의 ‘내 마음의 풍차’,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 박경리의 ‘토지’, 김용성의 ‘화려한 외출’, 토마스 하드의 ‘테스’, 미우라 아야꼬의 ‘빙점’ 등 주옥같은 문학 작품을 영화화 한 김 위원장은 이 때문에 소설가 협회로부터 ‘문학적인 감독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이 평생 영화 감독으로 살아오면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점은 지난 1986년 그가 중광 스님의 삶을 영화로 제작한 ‘허튼 소리’가 심의에 걸려 12군데나 가위질을 당했다는 점이다. 당시 공연물영상진흥협의회(공진협)가 ‘대중의 교란 목적을 가진 위험한 영화’ 라는 검열의 잣대를 들여댔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이에 항의하기 위해 영화 감독직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김 위원장이 선택한 일이 81년부터 연극영화과 강사로 나가면서 연을 맺었던 청주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일이었다. 김 위원장은 86년부터 겸임교수로 학교에 출강을 시작했다. 강사 활동부터 시작하면 김 위원장은 15년이 넘게 대학 교편을 잡은 셈이다. 그가 배출한 학생이 줄잡아 5백명은 된다. 김 위원장은 97년 다시 메가폰을 잡았다. 일본에서 영화 제작 제의가 들어 온 것이다. ‘사랑의 묵시록’ 이라는 작품이었다. 그는 일본으로 영화를 찍기 위해 정일성 촬영감독과 함께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본인들 배우와 일본 자본으로 탄생된 이영화는 당시 30만 관객을 끌어 모았다. 히트였다. 김 위원장은 “당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김 위원장은 그동안 1백편이 넘는 작품을 만들어 오면서 특히 기억에 남는 영화로 신성일 윤정희 주연의 ‘안개’와 신영균 조미령의 주연의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꼽았다.
‘안개’는 67년 아시아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타게 해준 작품이었고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당시 서울인구 3백50만의 10%에 달하는 30만의 관객이 극장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영등위 김 위원장의 집무실에는 이 두편의 영화 포스터가 액자에 담아져 걸려 있다.
김 위원장은 요즘도 일주일에 2∼3편씩의 영화를 본다. 그렇다고 밖에 나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지는 않는다. 영등위위원장 자격으로 국내 개봉관에 상영되기 전에 영화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많은 영화를 접하기 때문에 그는 영화를 보고 난 뒤 영화가 뜰 수 있다 없다를 알 수 있다. 김 위원장이 성공 가능 작으로 본 영화는 이정향 감독의 영화 ‘집으로’와 김동원 감독의 ‘해적 디스코왕 되다’ 였다. “영화를 보고 난 뒤 확실하게 성공하겠다 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너무나 느낌이 좋았거든요.” 김 위원장의 말대로 영화 ‘집으로’는 4백만이 넘는 관객이 극장을 찾았고 ‘해적 디스코왕 되다’도 현재 뜨거운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김 위원장은 국내 영화산업과 게임산업 중 향후 발전 가능성이 더 커 보이는 산업은 어느쪽이라고 보냐는 질문에 영화 못지 않게 게임은 투자액이나 수요를 볼 때 그 가능성이 문화산업 중 가장 크다고 내다 봤다. 그러나 그는 게임 산업이 더욱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정부에서 가이드라인 등을 지정하고 영등위는 외설이나 폭력성의 수위 조절 을 해 나가는 등 조화롭게 산업을 발전 시켜 나가려고 노력해야만 지금 보다 더욱 발전해 나갈 수 있다고 조언했다. 김 위원장은 영등위 위원장이라는 자리가 그리 좋은 자리만은 아니다고 말했다. 평생 영화만 생각하며 살아오던 사람이 지난 99년 6월부터 3년동안 영등위 위원장이라는 자리에 앉아 있던 것도 모자라 지난 6월 다시 영등위 위원장으로 재임 돼 3년 동안 또 다시 장충동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자신의 갑갑한 처지를 ‘우리 속에 갇힌 동물’로 표현했다. “처음 부임해서는 방안을 빙빙 돌아 다녔어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요. 어느 정도 익숙해진 지금도 갑갑할 때가 많아요. 생각 같아서는 밖에 나가 아내나 친구들과 여행도 하고 싶고 그래요. 그러나 사명감을 갖고 일하고 있어요. 조금 더 우리나라 문화산업 발전을 위해 일하자 자위하면서 열심히 일하려고 그래요.”
김 위원장의 취미는 정원수를 가꾸는 것이다. 현재 서울 장충동에 살고 있는 김 위원장은 45년동안 이사를 다닌 적이 없다. 때문에 4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해왔던 정원수는 그에게 있어 가족이나 마찬가지로 소중한 존재들이다. 김 위원장의 문화산업에 대한 철학이 궁금했다. “문화는 수치가 아닙니다. 또 문화는 과학이 아닙니다. 일종의 과학이나 상식에 의해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화는 창조에 의해 접근해야 합니다. 문화는 창의성을 바탕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문화는 새로운 것을 향해 자유롭게 발전해야 합니다. 국민들의 문화산업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지금처럼만 이어지고 개발시키려는 정책이 어우러진다면 우리 문화산업은 무한한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문화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표현의 자유가 반드시 보장 되야 합니다.” 평생을 문화 예술인으로 살아온 그답게 문화산업에 대한 철학과 소신이 그 누구 보다 뚜렸 했다.||■ 1929년 출생
■ 서울교대 졸업
■ 6, 25 참전(육군대위 예편)
■ 前 청주대 교수
■ 現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 저서 <김수용 영화독본> <예술가의 삶> <영화를 뜨겁게 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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