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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으로 미리 해 본 이라크 '전후복구' <1> 바그다드, '중동의 파리'로 재탄생한다

  • 지봉철
  • 입력 2003.04.28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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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구 : 500만명(전체인구 2400만명)
▪ 규모 : 가로·세로 각각 64㎞와 32㎞의 크기로 중심부에 티그리스강이 흐른다.
▪ 궁전들 : 티그리스강 서안 2.7㎞에 걸쳐 위치한 궁전들에는 후세인 대통령궁과 각종 정부 기관들이 들어서 있다.
▪ 특징 : 수없이 많은 후세인 대통령 동상과 초상화가 있다. 도시 내외곽에는 9세기에 지어진 대사원을 비롯해 1000년 내외의 역사를 가진 이슬람 사원과 이슬람 분묘도 있다. 또 중동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이라크 박물관도 위치해 있다.
▪ 역사 : 732년 사라센 제국 아바스 왕조의 제2대 칼리프 알 만수르가 새로운 수도로 정하면서 발달하기 시작했다.

바그다드는 인구 447만 8000명이 살고 있는 도시다. 시가지는 굽이져 흐르는 티그리스강 연변을 따라 길게 뻗어 있다. 강 양안에 걸친 시가지 중 좌안(동안)쪽이 중심부를 이룬다. 라시드가로는 전통적인 상업중심지로 이라크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 그 동쪽을 거의 병행해 뻗은 가지가로는 바자르의 한복판을 통과한다. 그 부근을 중심으로 파이살교 북쪽은 구시가, 남쪽은 신시가의 양상을 보인다.

북부에는 옛 왕궁, 이라크박물관, 바그다드대학 및 카지마인의 회교 대사원 등이 있고 남부에는 민족해방 모뉴먼트, 유럽풍의 레스토랑·호텔, 신주택가 등이 있다. 우안(서안)은 인구는 적으나 공항·서부역·방송국·관청가 등이 자리잡고 있다. 종래 융단·모직물·견직물 등 직물공업과 약간의 소규모 공업이 운영되었으나, 공업의 근대화에 주력, 연간 100만t의 원유를 처리할 수 있는 정유공장이 세워졌다.

국내 철도교통의 기점이자 요충이고, 또 북부의 모술을 거쳐 시리아·터키에 이르는 바그다드는 철도의 요지이다. 또 요르단·시리아·이란을 잇는 간선도로의 결절점이고, 카이로·베이루트와 더불어 중근동을 통과하는 국제항공로의 중계지이기도 하다.
우선 바그다드 재건의 목표는 인류문명의 요람을 그대로 복구하는데 있다. 이라크는 서양문명의 모체이자 요람에 자리하고 있다.

세계 4대 문명 중 최고로 오래된 메소포타미아문명은 바로 현 바그다드가 있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에서 일어났다. 이후 6000년 전으로 예상하는 성서상 에덴동산의 추방도 이곳에서 일어났으며 약 5000년전에는 메소포타미아문명을 꽃피웠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서양문명은 발전한다. 수메르문자로 여겨지는 ‘쐐기문자’와 천문학, 법, 바퀴, 학교, 세계지도 등은 그 당시 미개한 주변국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수많은 고속도로들이 교차하는 대규모 산업도시인 바그다드는 서기 762년 오스만 터키의 압바스 왕조가 이곳을 수도로 정한 뒤 성벽으로 둘러싸인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유럽이 중세 암흑시대를 맞아 혼란과 무지속에 퇴행할 때 바그다드의 이슬람 학자들은 그리스 고전을 아랍어로 번역했고 기하학을 창시했으며 걸작 문학작품들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1258년 칭기즈칸의 손자 훌레구 칸이 이끄는 몽골군이 처음 바그다드를 침공하면서 이 도시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훌레구의 20만 대군은 터키 기병 2만명을 간단히 제압하고 성을 포위한지 1주일만에 바그다드를 함락시켰다. 몽골군은 도서관을 약탈하고 사원에 불을 질렀다. 귀중한 예술품들을 닥치는대로 파괴하고 약탈했다. 바그다드가 재기하지 못하도록 도시주변 농경지에 물을 공급하는 운하마저 파괴해 결국 부유한 농민들은 살길을 찾아 사막으로 떠났다. 망가진 운하는 20세기에 와서야 복구됐다.

바그다드는 1500년대에 이르러 몽골군이 중앙 아시아로 물러가자 이번엔 오스만 터키와 페르시아를 거점으로 한 시아파 이슬람 제국 세파비드의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1509년 세파비드가 먼저 바그다드를 점령했고 그로부터 16년 뒤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대제가 바그다드를 장악해 100여년간 터키에 복속시켰다.
한때 페르시아에 넘어갔다가 다시 1638년 오스만의 무라드 4세가 탈환해 1차 세계대전 때까지 오스만 터키제국으로 남아 있었다.

터키가 독일과 동맹을 결성한 뒤에는 영국군이 바그다드를 침공했다. 찰스 타운센드경이 이끄는 영국군은 지금의 미-영 연합군과 같은 방식으로 남쪽에서부터 바그다드를 향해 진격했고 1914년 11월 바스라를 점령한 뒤 강을 거슬러 북진했다. 그러나 1915년 바그다드 외곽 24㎞지점에서 보급선이 차단되면서 영국군은 전체 병력의 40%인 1만1000여 명을 잃고 퇴각했다.

영국군은 남쪽 도시 쿠트에서 포위된 채 거의 5개월을 버텼으나 4차례의 구조작전이 모두 실패하면서 2만3000명의 희생자를 내고 항복했다. 영국군은 1917년 3월 타운센드경 병력의 4배나 되는 병력이 스탠리 모드 중장의 지휘에 따라 다시 바그다드로 향했고 이라크인의 환영속에 바그다드에 입성했다.
그러나 평화는 잠시, 80년대 이란과의 10년전쟁과 걸프전으로 바그다드는 다시 포연에 휩싸였고 이번 전쟁은 바그다드를 더욱 황페화시켰다. ||■ 하트라
바그다드에서 서북쪽으로 350㎞ 떨어져있는 하트라는 파르티아 제국(Parthia BC 247~AD 224)의 수도였다. 종교적인 목적으로 건설된 도시로, 후에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 역할을 담당하며 동서문화 교류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트라의 사원은 그리스 로마의 건축기법이 가미돼 파르티아 문명의 위대함을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아치와 돔형 구조를 가지고 있는 하트라의 이완(한쪽 벽면이 트인 큰 방)은 서양 건축 양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트라는 두 차례에 걸친 로마군의 공격에도 굳건히 견디다가 3세기 중엽 사산 왕조의 샤푸르 1세의 공격으로 붕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우르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고대 화려했던 도시 국가였다. 우르에서는 고대 왕실 분묘가 발굴됐는데, 이것은 메소포타미아 고고학 역사상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이 분묘에는 호화로운 가구와 궤짝, 침구, 악기 등이 발견됐다. 여왕 슈브 아드 묘에서는 정교한 금·은 세공과 보석을 박은 머리장식품, 빗, 귀걸이, 가슴장식품 등이 여왕의 시체와 함께 매장된 시녀 28명과 함께 발굴됐다. 이 외에도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된 하프, 7현금, 2마리 당나귀가 끄는 썰매, 황금그릇 등 다수가 출토돼 강력하고 번영했던 고대도시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 바빌론
고대의 가장 유명한 도시 중 하나로 BC 2000년대 초기부터 1000년대 초기까지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수도였다. BC 7세기와 6세기의 전성기대에는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이기도 했다. 바빌론은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88㎞ 떨어진 유프라테스 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고대의 주거지역인 ‘메르키즈’, 느브가넷살 왕의 궁전인 ‘바빌’ 등 유적지들이 남아있다. 왕의 궁궐 내에는 바벨탑과 지구랏트, 궁중정원 등 값진 유적들이 즐비하다. 후세인도 바빌론의 유적 복구에 몰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사마라
바그다드 북쪽으로 120㎞ 거리에 있는 사마라는 압바스 왕조 시절인 837년부터 892년까지 수도였으며, ‘사마라 미나렛’이 유명하다. 미나렛은 순례자들에게 불을 밝혀주거나 코란의 독경을 읽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 나선형 계단이 특이한 사마라 미나렛의 꼭대기에 올라가면 티그리스강 줄기와 넓은 평야 지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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