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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기리 : 힙합가수] “힙합이 뭔지 제대로 보여주겠다”

  • 김수연
  • 입력 2004.07.05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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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기리는 3년에 걸쳐 음악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첫 솔로앨범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앨범녹음작업을 시작한 건 지난 해 여름. 앨범을 만들어 놓고도 음반시장의 불황과 소속사 문제로 발매 일을 늦춰왔다.

“어떤 노래는 이미 3년 전에 만든 것도 있어요. 지금 만들면 더 세련되게 만들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디기리는 남들과 부딪히는 일없이 융화를 잘하는 성격이나 유독 음악활동에 있어서는 욕심 많은 고집불통이다. 때문에 허니패밀리 2집 활동을 끝내고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이 직접 프로듀싱해가며 솔로앨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오히려 막내였던 허니패밀리 시절이 편했죠. 내가 랩을 하면 형들이 다 받쳐줬으니까요.”

이번 작업은 자신만의 색깔을 완벽하게 표현해내기 위해 음악적 내공도 함께 쌓아나갔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고. “혼자 하는 작업은 늘 외로웠지만 힘든 만큼 보람이 있어요. 내 의도대로 음악을 만들어가면서 ‘이제야 제대로 내 음악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디기리의 아버지는 무역진흥공사에서 직원으로 주로 해외에서 일하셨다. 이로 인해 그는 요르단의 암만에서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아랍권인 리비아에서 자랐다. 때문에 최근 이라크전쟁이 누구보다 가슴아프게 와 닿는다.

당시 리비아에서도 이소룡 열풍이 거셌다. 리비아 사람들은 동양인만 보면 ‘잭키 챈’이라고 외치곤 했다. 그 또한 이소룡의 열혈 팬이었기에 유치원 대신 태권도장을 다니며 제2의 ‘잭키 챈’을 꿈꾸기도 했다.

디기리는 한때 무에타이(태국의 전통무술) 선수로 활동했던 전력도 있다. 그가 부모님을 따라 한국으로 돌아온 건 초등학교 5학년 때. 그러나 한국생활을 제대로 적응하기도 전에 사고로 아버지를 잃었다.

자립심이 강한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신문배달을 했다. 중학교 때는 선거사무소, 이삿짐 센터, 전단지 배포, 패스트푸드점, 막노동, 방청객 아르바이트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집안을 도와야한다는 생각보다 집에 의지하지 않기 위해서 돈을 벌었다. “힘들진 않았어요. 나를 낳아주시고 내 스스로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만큼 키워주신 부모님께 늘 감사했죠.” ||그런 그가 중3때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듀스 1집을 듣고 반해 랩에 심취한 것. 이전까지만 해도 이소룡이나 태권도에 미쳐있던 그가 고등학생이 된 이후 해외 힙합음반을 구하러 구석구석 헤매고 다니는 힙합 매니아가 된 것이다. 디기리의 음악적 재능이 알려진 것도 이때부터다.

손수 만든 자작곡으로 친구들의 무선호출기 안내멘트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 클럽에서 래퍼로 일했다. 클럽에서 프리랩핑을 시도한 최초의 인물도 바로 디기리다. 그때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과 허니패밀리에 합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으며 수 십여 앨범에서 프로듀서로 활동해 온 실력자로 인정받게 됐다.

그는 현재 서울산업대학교 대학원 정보산업공학과 재학 중이다. 대학시절부터 음악활동을 병행하면서도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었던 그는 밤새 지방공연을 다니더라도 밤새 리포터를 쓰고 칼같이 출석을 했다. 간판을 따기 위한 허울뿐인 학생이 되긴 싫었다는 게 그 이유다.

디기리는 자신의 음악을 제대로 선보일 수 있는 무대라면 어디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있다. 우선, 첫 솔로 앨범이 대박 나는 게 가장 큰바람이지만 돈을 벌면 음반제작자로 후배를 양성하고 뮤직비디오도 제작해 보는 게 소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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