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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이노 사장을 추억하며

  • 편집국장 김동욱 kim4g@khplus.kr
  • 입력 2013.02.26 18:42
  • 수정 2013.02.28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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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기자 생활 3년차에 접어든 1997년의 일이다. 데스크로부터 일본의 유명 게임 크리에이터를 인터뷰하라는 주문을 받았다. 지금이야 한국이 온라인게임으로 강국의 반열에 올랐으니, 그리 어려운 미션은 아니겠지만,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불법 시장이란 이미지가 여전히 강했던 때라 쉽지 않았다.

일본 개발사들은 한국 게임 미디어의 취재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여러 회사에 취재 요청서를 팩시밀리로 보냈다. 그러나 대부분의 회사로부터 한국 시장에는 발매할 예정이 없다며, 노탱큐란 답변을 들어야만 했다. 그러던 중, D의 식탁으로 한창 주목받고 있던 와프(Warp)에서 이이노 켄지 사장을 인터뷰해도 좋다는 답장이 왔다.
 
보름쯤 후, 약속된 날이 왔다. 나리타 공항에 내려 시내로 직행했다. 도쿄 신주쿠 중심가의 번화한 빌딩 숲에서 물어물어 와프(Warp)에 겨우 도착했다. 입구에 들어서자 초현대식 인테리어가 눈에 띄었다. 화장실 마다 설치돼 있던 비데를 난생 처음 보기도 했다. 게다가 대나무 숲을 연출한 듯한 정원같은 사무실 풍경은 한국에서 어두컴컴한 지하 개발사를 누비던 필자를 주눅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영화같은 호러 어드벤처 게임 ‘D의 식탁’의 대히트로 일본업계에서도 일약 스타 개발자 반열에 오른 이이노 사장을 인터뷰를 한다는 건, 게임 전문 기자로서 큰 영광이었다.
회의실로 들어온 이이노 사장은 거구의 몸집에 사자의 갈기같은 긴 머리, 카리스마 넘치는 날카로운 눈빛은 겉보기만으로도 기가 질렸다.

꽤 오래 전 일이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이이노 사장은 친절하고 자신만만했으며 치밀한 타입으로 기억된다. 그 만남의 인연으로 필자는 이이노 사장의 행보를 관심있게 지켜봤다.   

 D의 식탁의 대히트로 당시 콘솔 시장에서 격돌하던 소니컴퓨터엔터테인먼트와 세가는 와프의 후속작 잡기에 열을 올렸다. 이이노 사장의 두번째 역작 ‘에너미 제로’가 그들의 표적이 됐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거대한 양대 플랫폼 홀더들과 이이노 사장이 어떤 밀고당기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플레이스테이션의 신작 라인업을 공개하는 PS엑스포가 그 해에도 열렸다. 와프의 신작 ‘에너미 제로’도 PS진영의 뉴타이틀로 당당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다들 그렇게 믿었다.
PS엑스포 당일, 거구의 이이노 사장은 신작 발표를 위해 단상에 올랐다. 곧 청중들은 경악했다. 대형 스크린 속의 플레이스테이션 로고가 세가새턴의 마크로 스르륵 바뀌는 3D그래픽이 연출됐기 때문이다. 소니컴퓨터엔터테인먼트의 수뇌부들은 그 황당한 시추에이션에 사색이 됐음은 두말할 필요없다. 이이노 사장은 일부러 소니의 잔치에 와서 도발을 감행할 정도로 배짱 두둑한 사나이었다.

나중에 보도를 통해 알게 됐지만, 이이노 사장은 소니와 D의 식탁의 생산량 문제로 크게 의견 차이를 보였고, 플랫폼홀더의 이기적인 업무 처리에 불만을 품고 크게 한방 먹일 준비를 했던 것이다. 골리앗에 항거한 다윗의 느낌이다. 

그의 천재적인 창의력은 다음 작품에서도 발휘된다. 세가새턴으로 발매된 ‘리얼사운드 - 바람의 리글렛’은 화면은 전혀 나오지 않고 소리로만 게임을 플레이하는 방식이었다. 돌이켜보면,아마도 시각 장애인을 위한 최초의 상용 게임이 아니었나 싶다.
 
일본 게임업계에서 이단아로도, 천재로도 불렸던 이이노 켄지 사장이 지난 2월 20일, 고혈압성 심부전증으로 안타깝게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우리나이로 마흔세살에 불과했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필자 개인적으로도 꽤 충격적이다.
천재는 박명이라 했던가. 이이노 켄지 사장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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