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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작기행 [라그나로크] <6> 금발검사의 슬픈 눈빛은 내손을 칼집으로 가게하고···

  • 정리=안희찬
  • 입력 2003.08.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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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처음 만난 것은.. 나이트메어와의 접전에서 내가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이제 죽이는 것에 지루해져 가는 내게.. 게펜 3층의 미로는 일종의 자극제와도 같았으나 아직 내가 쉽게 넘을 수 있는 시험대는 아닌 것 같다.

“괜찮으십니까?”
상대는 매너 좋은 금발의 검사였다. 난 눈앞의 나이트메어를 솜씨좋게 일격으로 쓰러뜨려버린 검사를 경탄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햇빛 한점 들지않는 게펜 지하 3층에.. 지상의 것으로 느껴지는 메마른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은 검사의 금발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기고 있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름이라도.”
난 처음으로 만난 매너좋고 깔끔한 인상의 사람을 잊고 싶지 않았다. 서로 죽고 죽이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이 땅에서 이런 사람을 한명 쯤 알게된다는 것은.. 그 일 자체로, 내겐 크나큰 선물이다.

“이름....”
검사는 싱긋 웃었다.
“아주 오래전에 불리워 본 뒤로, 이름을 불러준 사람이 없어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약간의 안타까움이 스친다. 하긴 나같이 피냄새가 나는 자에게 알려줄 이름 같은 건 없겠지. 역시 이사람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인 것인가?

“프론테라제 수공 카타나.. 연마가 잘 된 것이 주인의 사랑을 잘 받는 듯 보이는군요.”
상념에 빠져있을 무렵 그가 내게 말을 건네 왔다. 싸구려 검을 들고있는 같은 직업의 종사자에 대한 연민이라 느꼈기 때문일까. 나는 말끝을 흐리며 답변할 수밖에 없었다.

“네...”
검사는 씁쓸한 웃음을 띄며 말했다.
“양손으로 휘둘러야 하지만, 검신은 그다지 길지않고... 가볍고... 마치 변종같은 칼이지요. 강력하고 파괴적인 양손검들 사이에서 미운 오리새끼 같은 돌연변이....”

변종, 그래.. 나같은 녀석을 일컫는 거겠지, 교황군을 꿈으로 삼았으면서도 실날같은 신에 대한 믿음도 남아있지 않은, 그저.. 살아있는 것을 베는 것에서 마음의 안식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 용병. 난 그의 말에 착 가라앉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이곳에 찾아든 나 자신을 향해 하는 말이기도 했다.

“별로 좋은 검이 되질 못하죠, 카타나는... 주인을 잘 만나더라도 카타나일 뿐입니다.”
내 답변에 그는 슬쩍 웃음을 띄며 말했다.
“어떤 칼을 가지더라도, 그 칼을 움직이는 건 주인의 뜻이라는 것도 아시겠군요.”
“......”
“칼을 한번 만져봐도 될까요?”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거절의 의사를 밝히는 것은 나의 자유. 아무도 없는 이런 위험한 곳에서 처음으로 만난 사내에게 자신의 칼을 맡긴다는 것은, 어쩌면 목숨을 담보로 한 도박이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
그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거두려는 차에, 난 허리춤의 카타나를 뽑아 그에게 넘겨주었다. 그것은 자신이 걷는 길과 같은 칼을 쓰는 자에 대한 암묵적인 신뢰였다.

“사랑을 받고있지만 슬퍼보이는 검입니다.”
“.....”
그는 카타나의 검신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칼과 대화를 나누는 장인과도 같았다. 쓸쓸한 표정으로 카타나의 검신을 훑어보던 그는 계속해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신이 하는 일이... 자신을 아끼는 주인의 본심과는 정반대의 일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칼과 대화를 하는 겁니까?.. 후후, 재미난 분이시군요.”
“그냥, 그런겁니다. 제가 느끼는 대로 말씀 드린 것 뿐입니다.”

그는 카타나를 다시 얌전히 내게 건네 주었다. 예상대로 그는 돈에 굶주리거나 살인에 미친 미치광이는 아닌 듯 했다. 그는 내게 자신이 한쪽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보여주었다.
“연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쓰고있는 검도.. 똑같은 카타나로군요.”
“....”

서로의 검을 맞교환 하여 품평을 하는 것은 정식작위를 받은 기사들이나 하는 행위인줄로만 알았다. 나같은 용병에게도 이런 대우를 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산다는 것이 가끔은 즐거운 일이기도 하군. 그의 카타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리는 동안, 나는 그의 칼이, 내가 가진 것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저기에 흠집이 많군요...”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베기 위해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검신이 너무 두꺼운 카타나 같습니다.”
“... 예..”
그것은 칼이라고 하기엔 어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방패에 가까웠다고나 할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그가 말했다.

“이것으로 사람을 벤 것은 이미 아주 오래전의 일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쓰고 있는 것 뿐입니다.”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그러려면, 지금보다 한층 강한 무기로 단련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 무기로.. 사람을 어떻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는 쓸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무기만이 사람들을 지킬 수 있습니다...”
“.....”
“살인병기인 저로부터 말입니다..”
그의 알 수 없는 말에 나는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그는 뭔가 낯선 기운을 느꼈는지 주변을 한번 둘러보더니,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이건 뭡니까?”
난 뜻하지 않은 선물에 의아해했고, 그는 별것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지우지 않은채 말을 이었다.
“세이프티링입니다.”
“귀한 물건을 용병에게 건네주셔선 안될 텐데요.”
“제겐 별건 아닙니다. 흔한 악세사리죠... 가진 여분이 많아서 도움이라도 되시라는 의미로 드리는겁니다.”
손을 뻗어 그가 내민 세이프티링을 건네 받았다. 그리고 말했다.

“... 돈이 되는 것이니 거절하진 않겠습니다.”
그가 내 대답에 기분이 나빠졌을까.. 라는 생각에 잠시 우울해졌으나, 다행히도 그는 내게로 보내는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사람들이 올 시간이 되었군요.”
“?...”
뜬금없이 사람들이 올 것이라는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난 몰랐다.

“슬슬.. 작별의 인사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남은 여정..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기약없는 이별이니, 다시 만나자는 인사는 하지 않겠습니다.”
난 카타나를 가볍게 옆으로 뉘이는 것으로 용병식 인사를 건넸다. 그도 나와 같은 인사로 화답했다. 그리고....

“저기있다!”
“내가 먼저다!!!!”
“건드리는 놈은 죽여버리겠어--!!!”
어디서 나타났는지 십여명의 중무장한 용병들이 그 인상좋은 검사를 향해 공격을 가해왔다.
“모로코의 용병들인가!!.. 인간사냥꾼들..”

난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어떤 대응을 해야할지를 잊고 말았다. 그러나 금발의 검사는.. 갑작스런 그들의 공격에도 별달리 당황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오래 전부터 그래왔었던 것처럼.. 일상이 되어버린 것처럼 그의 표정은 담담했고, 동요되지 않았다. 그는 어쩌면 나보다 몇배의 피의 강을 건너온 존재는 아니었을까?..

“오케이!!! 내가 먼저닷!!”
터번을 둘러쓴 용병하나가 그를 향해 칼을 날렸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잔류 병력들이 그를 향해 공격의 칼날을 집중시켰다. 나는 그의 그 무딘 카타나로 어떻게 저 전투를 끝을 낼지가 궁금해졌다. 난.. 말없이 그들의 공격을 받는 금발검사의 슬픈 눈빛을 보았다. 내 몸은 본능적으로 칼을 뽑아 그들을 향해 공격을 시도하려한다.. 그러나 그의 입은 나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입 모양으로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사람을 지키는 저의 방식입니다..’
그는 검으로 자신을 방어할 뿐 그들을 향해 공격을 퍼붓지 않았다. 제1, 제2 의 칼날이 그의 몸을 꿰뚫었고, 곧.. 당당하던 그 사내가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갑자기 몰려와 질풍노도처럼 공격을 쏟아 붓던 그들은 그가 쓰러지고 나서야 썰물처럼 어딘가로 밀려갔다. 용병들이 사라진 뒤, 난 쓰러진 그에게 다가갔다.

“.....”
난 처음으로 뭔가 뜨거운 것이 내 시야를 가로막는걸 느낄 수 있었다. 이 지옥같은 땅에서 처음으로 내게 잘해준 사람이었는데... 처음으로 말을 건넨 사람이었는데.. 금발의 검사는 힘겹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걱..정...말아요.... 어..차피.. 매일같..이, 해..오던 일..이니까..”
난 그의 꺼져가는 목소리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서서히 옅어져가던 그의 몸에서.. 그의 마지막 한마디가 들려왔다.

“... 이..것이... 나의.. 방...식”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그가 누워있던 그 자리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내게 무슨 말을 하고싶었던 것일까. 모르겠다.. 지금의 나로선 아무것도 모르겠다.

‘스윽~’
검은 말 한마리가 나를 향해 달려온다. 난 눈을 뜨지 않는다.
“촤아아악----- !!!”
나이트메어의 거대한 앞발굽이 느껴질 때. 내 손의 프람베르그는 녀석의 두 다리를 절단해가고 있었다. 바람이다... 너를 베는 것은 칼이 아니라 한줄기의 바람...

‘쿵!!.....’
육중한 나이트메어의 몸이 게펜 3층의 어두운 지하터널을 울리며 쓰러진다. 녀석의 숨결이 멎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눈을 떴다.
정확히 10년만에 찾은 게펜의 3층이다. 처음 이곳에 발을 디뎠던 피에 절은 용병의 모습이 아닌. 교황군의 크루세이더로서....

“다시 돌아왔어.. 이 지옥으로..”
난 몇번이고 그 말을 되뇌이다, 손을 입에 모으고 힘차게 외쳤다.
“내가~~!!!! 다시 돌아왔다!!!!...”

난 발길에 채이는 가벼운 돌부리들을 콧노래와 함께 발로 차내며 걸음을 옮겼다. 아주.. 오랜만에, 누군가를 만나러 오는 길. ... 기쁘다. 이런 나의 상념의 시간을 방해하려는 듯 또 다른 나이트메어 한 마리가 어디선가 나타나 돌진해왔다. 난 가벼운 흥얼거림과 함께 프람베르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 그때였다.

‘촤아아악!!! ----’
.... 눈앞의 나이트메어는 피를 흩뿌리며 허공에서 양단되었다.
10년....
나이트메어가 허공에 둥실 떠있는 그 찰나의 순간, 나는 그 낯설지 않은 칼 놀림에서, 내가 찾아 해메던 누군가의 흔적을 발견했다. ... 난.. 나이트메어를 반으로 쪼갠 그가 누구인지 알고있었다. 가슴에 기쁨이 벅차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 그가 내게 건네줄 말을 나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10년전과 같은 인사를 건넬 것이란걸 본능적으로 알고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으십니까?..”
나와 그의 말은..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똑같이 겹쳐 하나의 기분좋은 공명을 이루었다. 내게 말을 건넨 그는.. 10년전의 그 순간처럼.. 금발을 날리며 미소를 건네고 있었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그의 얼굴에 미소외의.. 또다른 감탄과 반가움의 표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며 멈춰있는 그에게 나도 처음으로.. 인사라는 것을 건넸다.

“... 살아있으면 만나는군요.”
그리고, 나는 손에 든 프람베르그를 옆으로 비스듬히 눕혀 먼 옛날 그와 나눴던 용병의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내게 환하게 웃는 그가 보인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그가...

글쓴이 ㅣ 몬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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