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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크래프트 판소리’를 아시나요!

  • 이석 프리랜서
  • 입력 2003.11.24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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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오후 2시 잠실야구장 내 온게임넷 스타리그 현장. 스타리그 결승전이 열리는 이날 대회장에는 전국에서 2만여명이 몰려 축제의 장을 방불케 했다. 관중석 외에 운동장에도 별도의 좌석을 마련했지만 순식간에 동이 났다.

게임업계 종사자들은 이날이 게임의 역사를 새로 쓴 날이라고 자평한다. 프로야구의 중심지인 잠실야구장에 처음으로 게임 대회가 입성한 날이기 때문이다. 온게임넷의 한 관계자는 “지난 2001년 장충체육관에 이어 출범 3년만에 잠실야구장에서 게임 대회가 열리게 됐다”며 “게임리그가 이제는 프로야구 못지 않은 대중 스포츠로 떠오르고 있다는 반증인 셈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날 행사장에는 또하나의 볼거리가 선보였다. 식전 행사로 초대된 박태오씨(33)가 그 주인공. 박씨는 ‘스타크 판소리’를 열창해 2만명에 달하는 게이머들을 뒤집어 놓았다.

“때는 어느 땐고 허니 서기 2003년 3월 어느 봄날. 저 바다 건너 이웃 나라에 사는 쓰메끼리상의 프로토스와 우리 동네 PC방 아저씨의 저그가 거 머시냐 배틀넷 로스트 템플에서 만나 가지고 한바탕 혈전이 벌어 졌겄다.”

시작부터가 심상치 않다. 전통 판소리인 ‘적벽가’ 적벽대전 부분을 본떠 만든 이 작품은 저그의 초반러시 장면을 코믹하게 다루고 있다. “장군∼ 캐논이 있사옵니다. 저글링들 캐논 있단 소리에 사지를 벌벌벌 떠는디” “아이고 장군님 나는 생긴지 2분도 아니되었소”

박씨가 입고나온 복장은 더 가관이다. 전통 의상은 온데간데없고 선글라스에 가죽코트, 군화차림으로 판소리를 열창한다. 여기에 더해 고수가 “아워 포스 언더 어택”(프로토스가 공격받을 때) “크아∼아악”(저그 유닛이 내는 소리) 등으로 맞장구를 친다.

순간 잠실벌은 웃음 바다로 변한다. 판소리에 문외한일 것 같은 신세대들의 입에서 “얼씨구” “잘한다” 등의 추임새가 절로 터져나온다. 현장에서 만난 이모군(21)은 “인터넷에서 많이 들어보았지만 실제로 보니 더 재미있는 것 같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이군은 이어 “판소리는 이제 더 이상 어른들이나 특정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며 “주변의 친구들도 한번쯤이 스타크 판소리를 들었다. 다음과 같은 포털사이트에는 팬클럽까지 생겼다”고 귀띔했다.

이렇듯 ‘스타크래프트’를 판소리와 절묘하게 결합한 소리가 신세대 사이에서 급속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스타크 판소리가 처음 등장한 것은 지난 2001년 9월. 전주산조예술제 조직위원회가 개최한 ‘또랑깡대 콘테스트’를 통해서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지방에서 진행된 공연인데다, ‘스타크래프트’를 모르는 사람도 꽤 있었기 때문이다.

이 판소리가 네티즌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7월. 전주산조예술제측이 콘테스트 출품작을 CD로 묶어 발매하면서다. 이후 스타크 판소리는 네티즌의 입에서 입을 통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이 판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게이머들 사이에서 왕따로 통할 정도.

취재진은 어렵게 스타크 판소리의 ‘창시자’인 박태오씨를 만날 수 있었다. 박씨는 “졸업 연주회를 앞두고 젊은층이 좋아할만한 작품을 구사하다 당시 젊은층으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던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판소리로 만들어보기로 결론을 내렸다”며 탄생 배경을 설명했다.

이후 박씨는 틈나는대로 PC방에 들러 스타를 배웠다. 이로 인해 수업을 빼먹은 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박씨는 “처음에는 고수를 맡고 있는 후배에게 부탁을 했다. 그러나 스타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다 보니 무슨말인지 몰라 직접 스타를 배우게 됐다”고 말했다.

박씨는 판소리라고 해서 5바탕처럼 딱딱한 주제를 고수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쉽고 재미있는 주제로 다가가는 게 대중들의 관심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게 박씨의 생각이다.

그는 “판소리하면 사람들은 일단 지루하고 따분한 것부터 떠올린다. 이같은 선입견을 깨기 위해서는 소리꾼 스스로의 의식부터 바꿀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물론 국악계 일각에서는 박씨의 이같은 행보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이다. “재미로 하는데도 한계가 있고, 성음이 안된 상태에서 무슨 소리를 하겠냐”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그동안 명창을 꿈꾸는 몇몇 소리꾼들로부터 질책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박씨는 판소리의 저변 확대를 위해서는 ‘선 재미, 후 관심’의 체계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득음을 지향하는 소리꾼들이 있다면,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역할도 필요한 게 아니겠냐”며 “정통 판소리를 듣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이 저의 몫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또랑깡대 : ‘도랑광대’의 센말. 기량은 출중하지 않지만 동네 대소사에서 소리를 하던 광대를 부르던 말. 전주산조예술제가 즉흥성과 현장성, 일상의 노래를 강조하는 쉽고 친근한 판소리 보급을 위해 이 말을 사용했다.

▶ 성음 : 소리를 하는 데 갖춰야 할 목소리. ‘판소리는 성음놀음’이라는 말도 있다.

▶ 5바탕 :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를 일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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