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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판 ‘네트’

  • 유양희 기자 y9921@kyunghyang.com
  • 입력 2006.02.27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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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년 개봉했던 ‘네트.’ 영화 ‘스피드’로 당시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산드라블럭이 컴퓨터프로그래머 안젤라로 분해 연기를 펼쳤던 영화다. 새로 나온 소프트웨어의 바이러스나 에러를 분석하는 전문가인 주인공이 어느 날 이유를 알 수 없는 음모와 엮이며 걷잡을 수 없는 사건이 펼쳐진다는 내용이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정보화 시대의 상징적 직업을 가진 인물로 등장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키보드의 간단한 놀림만으로 존재자체가 부정되는 피해자로 등장하게 된다. 투숙했던 호텔에서 자신의 기록이 사라지고, 소속됐던 직장이나 신용카드·여권 어디에서도 안젤라라는 사람의 기록은 하루아침에 ‘백지화’가 되며 사건은 점점 불어나게 된다. 안젤라 뿐 아니라, 그녀 주변의 인물들 역시 컴퓨터 조작에 의해 어느날 갑자기 당뇨병이나 에이즈환자로 바뀌는 아이러니가 곳곳에 등장하며 사건은 미궁으로 빠진다.

개봉 한 지 무려 십 여 년이 지난 영화 ‘네트’를 상기시킬 만한 일이, 지난 주 게임업계를 비롯한 IT업계 전반의 ‘메가 이슈’로 등장했다. ‘리니지’의 명의도용 사건이 그것이다. 컴퓨터 키보드 옆에 앉아본 적도 없는 수만 명의 사람들·가족들과 동료들이 특정 게임과 사이트에 버젓이 가입돼 있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제3자가 인터넷상의 개인 정보를 도용해 ‘리니지’ 회원가입을 한 것이라 밝혀졌지만, 네티즌은 엔씨소프트 측에 공개사과를 요구하며 해당 게시판이 들끓고 있다.

‘리니지’에 접수된 신고건수는 사건이 터진 사나흘만에 6만 명을 넘어선 상황이다. 경찰 관계자는 지난해 10월 이후 넉 달 동안 ‘리니지’에 접속한 아이디 수십만 건의 게임계정 기록을 분석한 결과 대부분의 불법 아이디가 중국에서 사용된 사실이 드러났다고 밝혔고, 이주 중반께 보다 자세한 사항을 발표할 예정이다.
‘리니지 사태’ 직후 주요 게임업계 관련주들이 동반 폭락하는 현상까지 벌어지며, 이번 ‘리니지 쇼크’가 주는 충격을 여실히 보여주기도 했다. 이들 수만 명의 정보 유출경로에 대한 각종 추측이나 대응방안에 대한 목소리들이 중구난방으로 쏟아져 나오며, 사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IT·게임강국’이라는 명예에 오명이 덧씌워지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게임을 필두로 한 IT강국, 그 중에서도 큰 역할을 톡톡히 해온 게임. 그리고 또 그 중에서도 명실상부한 1위 업체인 엔씨소프트가 그 허점의 핵으로 떠오른 형국이다. 하지만 문제는 게임업계를 중심으로한 IT업계 전반에‘제2, 제3의 리니지 사태’가 생기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리니지’ 외의 다른 게임들과 포털 사이트에서도 대규모 명의도용이 있었다는 신고가 잇따르고 있다는 점이 이 같은 우려를 낳고 있다.

정부와 게임ㆍ포털업계가 인터넷 상의 명의도용을 근절하기 위해 주민등록번호 수집 금지 등 강도 높은 대책을 추진하기로 나서며, 인터넷상에서의 명의도용을 방지하기 위해 주민등록번호 수집을 금지하되 본인 확인이 필요한 경우 다른 대체수단을 도입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NHNㆍ다음ㆍ네이트 등 인터넷 포털업체와 엔씨소프트ㆍ웹젠ㆍCJ인터넷ㆍ써니YNK 등 대형 게임업체들도 공인인증서 도입 등 다각적인 명의도용 근절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내놓은 이 같은 대안들은, 해외 대표 사이트들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기본적으로 시행해왔던 방안이라는 것이 더욱 씁쓸하다. 북미와 호주 등 대부분 국가의 대형 사이트에서는 가입단계에서 개개인의 ‘내셔널 시큐리티 넘버’를 묻는 무례(?)를 이미 근절해왔다는 점이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친다’는 공허하고 식상한 속담만이 귓가에 쟁쟁할 뿐이다. 1995년 어윈 윙클러 감독이 만든 테크노 스릴러 영화 ‘네트(The Net).’ 당시 컴퓨터 통신조차 낯설었던 사람들한테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비쳐졌지만, 지금 그 황당무계한 일들이 게임강국 대한민국, 그 한복판에 너무나 버젓이 일어나는 세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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