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데자뷰
[데스크칼럼] 데자뷰
  • 편집국장 김동욱
  • 승인 2015.12.10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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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에 빠뜨린 파리테러 사건에 황당하게도 게임이 휘말렸다.
120명이 넘는 희생자를 낸 이 엄청난 사건을 일으킨 범인들이 세계적인 인기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4’를 이번 범죄에 악용했다는 것이다.

발단은 이렇다.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인 11월 14일, 북미의 유력 미디어 포브스(Forbes)는 “파리 테러범들이 플레이스테이션4를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덩달아 데일리메일과 더 텔레그라프 등의 주요 미디어들도 일제히 이 소식을 인용보도하자 가뜩이나 테러 공포에 휩싸인 유럽인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가십을 다루는 사이트들과 각종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마치 사실인양 퍼져나갔다. 소문이란 게 언제나 그렇듯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어느새 플레이스테이션4는 파리테러 사건의 공범(?)이 돼 있었다.

그러나 파리테러 사건에 플레이스테이션4가 활용됐다는 증거는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소문의 발단은 벨기에 내무장관이 테러가 발생하기 3일 전에 열린 안보회의에서 “플레이스테이션4를 이용해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을 추적하는 것은 왓츠앱(카카오톡 같은 소셜 메신저)의 채팅 내용을 확인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고 한다. 이를 벨기에의 한 미디어가 명확한 시점을 확인하지 않은 채, 내무장관이 “플레이스테이션4를 테러범들이 커뮤니케이션용으로 활용했을 지도 모른다”고 말했다고 보도한 것이다. 게다가 벨기에 경찰이 용의자의 집에서 플레이스테이션4를 압수했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보도가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오면서, 소문은 기정사실처럼 굳어버렸다.

순식간에 유럽지역에서 플레이스테이션4라는 게임기는 ‘악의 축’이 된 셈이다. 사태가 확산되자 포브스는 파리테러와 플레이스테이션4와 관련된 보도는 잘못된 것임을 인정했으나, 아무런 의문이나 확인 절차 없이 막무가내식 보도를 일삼았던 일부 매체들의 행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유럽에서 게임을 둘러싼 이상한 매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2년에는 플레이스테이션2가 아주 짧은 기간에 무려 4,000대씩이나 미국에서 이라크로 수출된 적이 있었다.
당시 이라크는 국제사회의 문제아 취급을 받던 때라 특정한 첨단 장비의 이라크 수출이 유엔에 의해 금지되던 민감한 시기였다. 당연히 수많은 미디어가 이를 대서특필했다. 보도 내용도 매우 자극적이었다. 이라크 정부가 플레이스테이션2를 이용해 미사일 제어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는 것. 게다가 플레이스테이션2를 12대 연결하면 최첨단 슈퍼컴퓨터에 필적하는 성능을 구현한다는 미확인 소문까지 나돌았다. 서방 세계는 마치 게임기를 이용해서 3차 대전이라도 일으킬 수 있다는 착각에 빠졌던 모양이다.

게임 업계인이라면 파리테러와 플레이스테이션4 사건에 데자뷰를 느낄 지도 모르겠다. 사건만 일어나면, 범인이 무슨 게임에 심취했다면서 게임을 ‘사회악’으로 몰아세우는 우리 사회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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