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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르포 '여관 PC방촌'을 가다

  • 이석 프리랜서
  • 입력 2002.08.13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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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저녁 8시. 서울대 입구역 주변에서 대로를 따라 관악구민회관 방향으로 가다 보면 골목마다 여관이 포진해 있다. 인근 상가에 가려 화려한 불빛이 가려져 있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그 위용에 놀라게 된다.
관악구청에 따르면 현재 봉천7동에 50여개의 여관이 성업 중이다. 이날도 주말을 맞아 초저녁부터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대부분의 여관은 이미 객실이 동이난 상태. 허리까지 내려온 커튼 사이로 보이는 주차장은 각종 승용차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그러나 ‘불륜 공화국’이라 불리는 이곳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고성능 PC는 물론이고 젊은층을 붙잡기 위한 각종 소프트웨어를 설치하고 있다. 변화의 몸짓은 골목 초입에서부터 감지된다. 평소 같으면 ‘목욕시설 완비’ ‘TV 및 비디오 설치’ 등의 글자가 눈에 띄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요즘 봉천동에서는 이같은 문구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대신 ‘펜티엄4 완비’ ‘초고속통신 설치’ 등이 적힌 플래카드가 이곳저곳에서 눈에 띄었다. 업소마다 경쟁이라도 하듯 이같은 사실을 강조했다.
화려한 네온사인을 따라 한 모텔로 들어가 보았다. 언뜻 봐서는 일반 여관과 다를 게 없었다. 주차장 옆으로 나있는 현관, 약간 어둠침침하면서도 은은한 조명을 갖춘 입구 등 모든 것이 ‘러브호텔’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객실 안으로 들어가자 상황은 달랐다. 사무집기들이 깔끔하게 정리된 객실은 잠자는 곳이라기보다는 ‘미니 오피스’에 가까웠다. 객실 한쪽에는 펜티엄4 컴퓨터가 놓여져 있고, 즐겨찾기에는 각종 유용한 사이트들이 등록돼 있었다. 게임 애호가들을 위한 각종 게임도 설치돼 있었다.
T모텔의 허모(42) 사장은 “올 초 객실 하나에 시범적으로 컴퓨터를 설치한 적이 있었는데 반응이 좋았다”며 “이제는 손님들도 수준이 올라 야한 비디오만으로 붙잡기는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주차장 커튼에 ‘인터넷 설치 완비’라 적힌 플래카드를 걸고 ‘손님몰이’에 나선 곳도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우선 ‘인터넷 1만원’이란 명패가 눈에 띄었다. 이곳은 성인게임이나 인터넷 성인방송 등을 유료로 이용할 수 있는 곳이다. 프론트에서 계산하면 사용이 가능하다.
이용료는 숙박료 외에 2시간에 4천원, 5시간에 1만원을 추가로 지불한다. 일반 PC방에 비해 약간 비싼 편이지만 알고보면 그렇지도 않다. 각종 부대시설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목욕탕은 기본이다. 에어컨을 비롯한 편의시설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엔 PC방보다 이익이라는 게 이 업소 관계자의 설명이다.
봉천동 ‘여관 PC방’의 경쟁력은 이미 인근 직장인들 사이에 입소문이 난 상태. 이곳에서는 벌건 대낮부터 시간을 때우다 돌아가는 직장인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K모텔의 한 종업원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낮시간대는 남녀 손님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요즘은 회사원도 자주 찾아온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여관에서 피서를 즐기려는 ‘알뜰파’들이 몰려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이 종업원에 따르면 이들은 2∼3일치 숙박료를 계산하고 안에서 두문분출하며 게임만 한다. 식사도 안에서 해결한다. 게임을 하다 지겨우면 에로비디오로 잠시 머리를 식히는 정도.
주말에는 ‘합리파’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변한다. 야외에 나가봤자 고생만 하기 때문에 아예 이곳에 눌러앉아 주말을 보내는 연인들이 많다. 애인과 7년째 사귀고 있다는 김모(34)씨는 “주말이 되면 예전에는 영화관이나 PC방에 갔지만 요즘은 아예 여관으로 직행한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 PC방의 경우 종일 요금이 7천원∼1만5천원 사이. 숙박료의 경우 2인 기준으로 3만원 선이기 때문에 차이가 많지 않다. 2명 이상 이용했을 경우 오히려 이익이다. 덤으로 시원한 에어컨 등 부대시설을 만끽할 수도 있기 때문에 주로 젊은층에서 많이 이용한다.
이같은 사정은 종로도 마찬가지다. 인사동 주변 여관촌도 최근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기존의 서비스로는 손님들의 눈길을 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관마다 거액을 들여 인터넷이 가능한 PC를 설치했다. 건물 입구나 옥상에는 ‘인터넷 가능’ ‘초고속통신 설치’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경쟁적으로 내걸고 홍보에 나섰다.
한 모텔 업주는 “이제는 에로 비디오를 틀어 손님 잡는 시대는 지난 것 같다”며 “돈이 좀 들기는 했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장사가 되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물론 밤에는 취객들이 몰려와 종업원들을 귀찮게 하기도 한다. 이 모텔의 종업원 김모(36)씨는 “술에 취한 손님들이 찾아와 ‘방끼리 네트워크를 할 수 없겠냐’고 물어보는 경우가 많다”며 “여관=PC방으로 생각하는 손님들이 많다”고 토로했다. 단체로 온 손님들은 아예 옆방 PC를 빌려달라고 으름장을 놓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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