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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인터렉티브 박재덕 대표] “구름의 미래, 게임 포털 속에 답이 있다”

  • 윤영진 기자 angpang@kyunghyang.com
  • 입력 2006.11.27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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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라. 그리고 주도하라. 많이 이들이 지금 이 시각에도 끊임없이 변화를 꿈꾼다. 하지만 이를 실행에 옮기는 이들은 많지 않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기 마련이라는 자연의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변화란 대부분 파괴적이며, 때로는 깊은 상처를 남긴다는 사실을 아는 까닭이다. 그러나 조직의 생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바로 변화가 그러하며, 이는 발전을 위한 필수 과정임에 분명하다. 불변(不變)은 기업에 있어 사형선고와 같음을 깨닫고, 최근 변화를 기업 혁명의 키워드로 삼은 이가 있다. 그가 바로 구름 인터렉티브의 박재덕(36) 사장이다. 변화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일탈. 그는 게임포털을 통해 그 해답을 찾아냈다.

[운명]
1998년 7월 어느 날. 지금의 박재덕 구름 인터렉티브 대표에게 등기우편 하나가 배달됐다. 국내 대표 가전회사에서 발송한 것이다. 공채에 응해달라는 내용의 통지서였다. 하지만 박재덕은 이를 단박에 거절했다. 아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해당 가전회사에 특채로 합격했음에도, IMF여파는 그에게 합격 취소라는 슬픔을 안겨다 주었다. 그리고 이어진 입사 재지원 요청. 박재덕은 말한다. “울컥 화가 났다. IMF를 명분 삼아 신입사원 전부를 합격 취소시켰던 회사였다. 경영 방침이 바뀌어 입사를 재지원하라는 통보는 그저 국내 가전회사에 대한 불신만 안겨줬다. 새로움에 대한 갈증만 키워줬다.” 박재덕은 보다 큰 어려움 속에 자신을 가둘 결심을 했다. 한번 뿐인 인생.

주변 지인들의 권유에 따라 평범한 인생을 꿈꿨던 박재덕. 하지만 합격 취소와 입사 권유 통지는 그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했다. 그때 비로소 자신이 가야할 길을 찾았다. 운명이란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산업으로의 발돋움은 커녕, 불법과 위기, 블랙마켓의 온상이었던 게임 분야에의 투신. 미래에 대한 불안에 당장 주변 지인들의 만류가 거셌다. 미쳤다는 말이, 정신 차리라는 호통이 연일 이어졌다. 하지만 그 무엇도 결코 그를 막아설 수는 없었다. 박재덕은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정녕 잘하는 것을 찾고 싶었다. 불을 보듯 뻔한 삶에 나 자신을 가두고 싶지 않았다. 게임이 나를 살렸다.”

[고난]
크레아21. 박재덕이 처음 입사한 게임회사였다. 손이 부족했다. 바로 게임 개발에 투입됐다. 밤이 따로 없었다. 배고픔의 연속이었다. 한 푼 가치 없는 일로 여겨질 만큼, 언제나 주머니는 가벼웠다. 열정 하나로 버텨내며 꿈을 키워갔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또다시 시험대로 이끌었다. 그의 처녀작 ‘녹색전차 해모수’가 세상의 빛을 본 시점. 회사가 부도를 맞았다. 힘겨운 나날이 이어졌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박재덕은 말한다. “쉬운 길이 아님을 절실히 느꼈다. 수많은 선배 개발자들이 울분을 토하고, 쓰러져 갔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같았다.” 그 당시 박재덕은 안전장치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언젠가 모든 개발자들이 행복을 느끼는 회사를 만들겠노라 결심했다.

크레아21이 남긴 것은 배고픈 현실과 ‘소마신화전기’의 판권. 두 가지 뿐이었다. 게임계는 그에게 또다시 고난의 길만을 약속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컴앤조이에 입사해 PC패키지 게임 ‘소마신화전기’ 개발에 스스로를 불태웠다. 일말의 명성도, 스스로의 성공도, 그 무엇 하나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박재덕이 원하던 것들이 아니었다. 좋은 게임, 모두 행복한 사이버 세상에의 구축. 그의 목표점은 이처럼 보다 먼 곳을 바로보고 있었다. 박재덕은 말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은 거짓이다. 고생이라고 느낀다면, 이미 고생이 아니다. 도전과 모험은 위험성만을 동반할 뿐이다. 여기에 고생 따위의 사치스러움이 낄 자리는 없다.” 배고픔도 모르던 시절. 그는 당시를 가리켜 도약에의 즐거움이 그저 과했던 때라 회고한다.

[필연]
2000년 8월. 자신이 꿈꿔왔던 행복론을 실행에 옮기고픈 간절함이 최고조에 달했다. 돈이 목적이 아닌, 개발자들이 즐겁고, 유저들이 유쾌한 그만의 행복론. 하지만 가진 것이 없었다. 투자자를 찾기 위해 거침없이 달렸지만, 누구도 무명의 박재덕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다. 자괴감에 사로 잡혔다. 이 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현재 엠게임의 대표이사인 손승철 회장이었다. 개발비 전액 지원을 약속했다. 지옥과 천당을 오간 느낌이었다.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박재덕은 말한다. “그 무엇도 이뤄놓은 것이 없었다. 단 1% 성공 가능성. 이것만으로도 세상은 내 것이었다.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손대표에게 큰 빚을 졌다.” 손대표의 도움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온라인 관련 기술도 전수받았다. 물론 받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자체 개발한 3D게임 엔진을 지원했다.

하지만 이러한 지원과 열정만으로 부딪히기엔 만만치 않은 미답(未踏)의 영역이었다. ‘에버퀘스트’ 등 기존에 선보였던 명작들을 분석하는데 하루 24시간을 모두 투자했다. 이때 깨달은 것이 바로 ‘역전 가능성’이었다. 박재덕은 말한다. “단순히 오래 즐겼다고 높은 곳에 선다면 행복함은 없다. 가위바위보처럼 역전할 수 있는 짜릿함이 존재할 때 비로소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방향이 보였다. 불도저식 추진력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사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노아시스템을 설립했다. 곧이어 새내기 개발자들 위주로 팀을 구성했다. 그리고 2002년 7월. 그의 대표작이자, 그가 일생을 걸었던 3D전략MMORPG ‘나이트 온라인’의 오픈베타 테스트가 감행된다.

[모험]
도박이었다. 무명의 개발사. 온라인 게임 처녀작. 당시 별다른 성공을 이뤄내지 못한 퍼블리셔 엠게임. 적은 마케팅 비용. 대중적 관심을 이끌지는 못했다. 동시접속자수도 폭발적으로 늘지 않았다.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킬 화려함도, 스포트라이트 한번 받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꾸준한 상승세. 이탈하지 않는 골수 유저층을 기반으로, 어느 순간 노아시스템은 게임계의 빅뱅이 됐다. 알짜 회사로 자리매김했다. 박재덕도 이때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박재덕은 말한다. “대한민국에서 통한다면 세계에서도 통한다. 국내 시장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가장 큰 시장이자, 불법복제로 악명이 높았던 중국. 위험성과 함께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이 시장에 모험을 감행했다.” 수출은 발 빠르게 이어졌다. 중국 2위의 게임 퍼블리셔 소후닷컴을 통한 수출은 순조로웠고, 현지 반응도 좋았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박재덕을 비웃기라도 하듯, 실패의 암운을 드리웠다. 중국을 기점으로 세계를 뒤흔들었던 사스 파동. 연이어 중국 정부의 사스 사태 공식 발표가 이어졌다. PC방을 찾는 이들은 없었고, 수많은 현지 PC방들이 문을 닫았다. 인프라가 부족했던 중국 시장. 최고 기대작 ‘나이트 온라인’은 한 순간 철저히 외면 당했다. 모험은 실패로 끝났다. 박재덕은 말한다. “위기(危機)의 ‘기’자는 기회(機會)의 ‘기’자이다. 내 사전에 실패는 있을지언정 포기는 없다. 중국 시장의 실패 경험은 또 다른 자산이 됐다.” 그의 말은 결코 호기가 아니었다. 북미와 일본, 대만과 말레이시아에서의 반응은 중국은 물론, 국내보다 폭발적이었다. 대성공이 이어졌다. 감행한 모험은 결국 성공으로 끝을 맺었다.

[도전]
2003년 8월. ‘나이트 온라인’이 탄력을 받던 시기. 박재덕은 또 한번의 비상(飛上)을 꿈꿨다. 보다 큰 그림. 하지만 ‘성공 게임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박재덕을 사로잡았다. 좋은 영화를 본다고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3년을 끌어온 고민. 그는 책 속에서 해답을 찾아냈다. 박재덕은 말한다. “대서양을 최초로 횡단한 린드버그의 명성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뒤이어 그보다 빠르게, 그보다 적은 연료로, 그보다 안전하게 대서양을 횡단했던 이가 있다. 하지만 세상은 2등을 기억하지 않는다.” 선도자의 법칙. 그것은 박재덕 인생의 제 2막을 여는 교훈이 됐다. 크게 깨달았다. 최초의 그래픽 온라인 게임 ‘바람의 나라’가 지금도 서비스되고 있고, 사회성을 동반한 ‘리니지’는 국내 대표 온라인 게임으로 자리 잡았다. 국내 최초 3D 온라인 게임 ‘뮤’도 대대적인 성공을 거뒀다. 하나하나 맞춰가자,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7년. 박재덕은 또 한번의 도전을 감행한다. 하지만 엠게임과는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달랐다. 새로운 게임 포털. 새로운 장르. 새로운 게임 서비스에 모든 것을 걸었다. 문제는 여전히 존재했다. 서비스 경험 제로. 유저DB 전무. 마케팅 능력 미지수. 검증되지 않은 포털 성공 가능성. 차라리 ‘나이트 온라인’ 차기작을 개발하는 것이 보다 안정적인 수익원을 가져온다는 계산이 섰다. 하지만 박재덕은 망설임 없이 가시밭길을 선택했다. 욕심쟁이 게임사 수장답게, 행복론의 완성 앞에, 신개념 게임포털 구름 인터렉티브를 선택했다. 박재덕은 말한다. “수년간 게임 포털은 정체돼 있다. 수많은 회원DB를 가지고 있는 게임 포털들의 실패가 이어지고 있다. 개발에 대한 미래가치가 필요한 때이다. 그 정점이 게임 포털이다. 그 시작이 구름이다.”

[원점]
노아시스템을 설립할 당시, 박재덕은 외로웠다. 하지만 구름 인터렉티브를 설립할 때, 그는 결코 외롭지 않았다. 노아시스템과 꾸러기소프트에 속한 개발자들 150명이 그와 함께 했다. 박지훈 KRG 전 대표도 그를 도왔다. ‘나이트 온라인’의 성공을 통해 200억 양질의 자금도 확보했다. 성공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노아시스템 설립 당시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박재덕은 다르게 말한다. “초심으로 돌아왔다. 성공 가능성만을 따진다면 자만하기 십상이다. 게임 산업이 고난의 시기를 약속했을 당시, 뼈저리게 느꼈다. 과오는 범하지 않는다. 또다시 모험이 시작됐을 뿐이다.” 그게 지금의 박재덕이다.

처음엔 몰랐다. 그저 겉으로 드러나지만 않았을 뿐, 크게 성공한 게임사 대표로만 그를 기억했다. 하지만 그는 분명 달랐다. 게임 기획과 게임사 대표, 마케터까지 병행하지만 결코 기획이니, 경영이니 따위의 진중한 철학을 설파하지도, 심각해지지도 않는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자의식을 내세우지 않는다. 모두들 상장을 꿈꾸지만, 게임 산업이 흥행 산업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수년간 상장할 계획조차 없다. 말만으로 자기 안에 없는 걸 표현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그의 인간적 매력. 그가 성공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는 박재덕 대표. 그의 행복론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사진=김은진 기자 ejui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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