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개발자들이 살해한 스스로의 양심

  • 윤영진 기자 angpang@kyunghyang.com
  • 입력 2005.05.02 09:54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얼마 전 국내를 대표하는 만화가를 만났다. 최근 그가 몰두하는 작업은 출판사의 주문으로 이미 ‘뜬’ 게임을 만화로 재창조하는 일이었다. 실상 해당 게임은 게임방송은 물론, 공중파 방송에까지 영향력을 자랑하듯 수차례 그 모습을 드러낼 만큼 인지도 면에서도, 수익 면에서도 성공한 대표 온라인게임이었다. 그러나 그가 만화로 그려내기 위해 원제작사로부터 받은 자료라고는 고작 게임소개서와 캐릭터 아트웍 몇 장이 전부였다. 캐릭터의 설정도, 세계관도, 스토리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게임이 성공한 것 자체가 의아할 지경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이에 앞서 지난 주 평소 알고 지내던 국내 대표적인 게임 개발사의 기획팀장과 술잔을 기울인 적이 있다. 술자리 중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가 불거졌다. 그는 게임에서 세계관이 왜 필요하냐며 역설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실상 그 누구도 시나리오나 세계관엔 관심조차 없다는 것이 이야기의 핵심이었다. 이보다는 보다 멋진 그래픽이 우선이고, 깔끔한 캐릭터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성공 확률을 높이는 방안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관심조차 두지 않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할 필요가 없다는 그의 말에도 분명 일리는 있다. 다른 수많은 개발자들도 비슷한 생각임을 이미 수없이 확인해왔기에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대목에서 두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첫째, 게임 개발사들이 세계관과 스토리에 들이미는 단골 변명거리인 ‘제작기간의 리스크’는 분명 무시할 수 없는 사안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들은 우리 게임 산업 태동시기부터 개발사들이 불러대던 지정곡이 아니었던가. 실상 게임의 세계관과 스토리가 게임 제작을 어렵게 만든다는 모순된 주장을 더는 반박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제작환경이 나아지면 이러한 부분들을 신경 쓸 것인가를 묻고 싶다. 아니 국내 대표 MMORPG 중 세계관과 스토리라는 밑그림이 ‘제대로’ 완성된 게임이 얼마나 되는가를 되묻고 싶을 뿐이다.

둘째, 세계관과 스토리라는 배경은 쉽게 드러나지 않을 뿐 결코 등한시할 요소가 아니라는 점이다.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 영화화했던 ‘파이날판타지’나 국내 애니메이션의 새 지평을 열겠다며 야심차게 제작된 ‘원더풀 데이즈’의 실패 이유에 대해 고찰할 필요성이 있다. 매 순간 화려한 그래픽이 두 작품의 공통점이다. 화려하고 멋진 이펙트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럼에도 실패한 이유는 무얼까. 물론 다양한 이유가 존재하겠지만 그 중 세계관과 줄거리의 빈약함도 한몫하고 있다. 단 수십 초짜리 CF라면 모르되, 1시간 이상 즐기는 영화였음에 스토리의 미비는 위험천만한 일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이처럼 세계관과 스토리는 게임의 깊이를 더하는 요소임에 분명하다. 유저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해서 태만시할 부분이 결코 아닌 것이다.

개발자들 또한 생산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유저란 이름의 고객들이 보다 높은 만족을 얻도록 다양한 방안에서 준비해야 함을 뒤로 하더라도, 게임의 수명을 극대화 시키는 기본 베이스임을 배제하더라도 이는 개발자 스스로가 자신의 양심을 죽이는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단순히 감정적 선동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는 부분은 버려도 좋은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 자유로운 개발자는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참회의 절이 어찌 젊은 기성인들만의 몫이겠는가. 세계관과 스토리의 완성은 더는 미룰 수 없는 개발자들의 마지막 보루다. 보이지 않는 부분에까지 완벽을 다하려는 최선의 노력. 그것만이 개발자 스스로의 양심에 당당해질 수 있는 진리가 아닐까.

저작권자 © 경향게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