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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파이널 앞둔 정수영 감독 심경고백

  • 윤아름 기자 imora@kyunghyang.com
  • 입력 2006.02.20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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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리그 후기리그 결승으로 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 KTF 매직엔스(이하 KTF)와 삼성전자 칸의 대결. 정규리그 23연승을 달성한 KTF의 우승을 점치는 게임팬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모든 이의 예상을 부수고 내리 4세트를 상대팀에게 내주며 결승 진출에 좌절하고 말았다. 말로 할 수 없이 처참한 상황에 감독과 코치, 선수들은 모두 고개를 숙인 채 경기장 벤치를 홀연히 떠나갔다.

그로부터 이틀 뒤 박정석의 자진 삭발을 지켜본 동료 선수들은 그를 따라 전원 머리카락을 ‘싹둑’ 자르기에 이르렀다. ‘독기’를 품고 마지막 프로리그 그랜드 파이널 우승을 노려보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 젖은 채로 바깥을 다녀오면 서리가 내릴 만큼 추운 날씨에 이들의 삭발은 더 날카롭고 매서웠다. 삭발의 결심은 KTF의 정수영 감독 역시 다르지 않았다. 마치 폭풍 전야의 고요를 보는 듯 한 달 남짓한 시간동안 조용하기만 했던 KTF 숙소는 정 감독의 목소리로 닫힌 말문이 열렸다.

경질론 대두, 해결책은 바로 ‘나’
“플레이오프 경기가 끝난 후 주변에서 무슨 일 있냐는 질문을 참 많이 받았어요. 평소보다 이상하리만큼 조용하다더군요. 하지만 단 한번도 이기지 못하고 완패하는 상황에선 화도 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기리그 결승에서 3대2로 패했을 때 선수들에게 호통을 쳤죠.” 정 감독의 얼굴은 그 때의 ‘악몽’이 떠오르기라도 한 듯 어두워졌다. 전기리그에서 프로 스포츠 사상 역대 최고기록인 23연승을 달성한 KTF에게 우승, 그 이상의 결과는 없을 것만 같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군요. 완패의 원인이 무엇일까에 대한 분석은 없었습니다. 문제는 감독, 저 자신이었죠.” 한 팀을 이끌고 있는 수장으로서 이 같은 결론을 내리기까지 정 감독 스스로가 가졌던 죄책감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후기리그 플레이오프전 이후 각종 e스포츠 관련 사이트에 KTF 선수들의 능력저하는 물론, 이 같은 원인으로 정 감독의 자질 불충분을 내세우며 ‘경질하라’는 게임팬들의 거센 비난도 무시하지 못 했을 것이다.

“나날이 연승을 기록하면서 선수들의 중압감은 더욱 커졌습니다. 외부에서 (우승을) 거의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선수들에게 ‘다음 경기에 지면 어떡하지’하는 불안감은 당연한 것이었죠. 제 욕심이 컸던 탓일까요. 팽팽하게 당겨진 선수들의 긴장감을 풀어줄 여유를 갖지 못했습니다. 대화의 시간조차 아까웠죠. 오히려 더 ‘나가서 싸우라, 이기라’라고 강요했던 것 같네요.” 그동안 쏟아진 팬들의 비난을 충분히 감내하는 모습으로 정 감독은 말을 이어갔다. “이미 진 것에 대한 후회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원인을 찾았다면 이제 해결을 해야 한다는 것뿐이죠.”

얼마 전 정 감독은 자진해서 자신의 선수들과 비공식적으로 1박 2일 일정의 온천 여행을 다녀왔다. 묵은 때를 벗기듯 선수와 감독 사이의 멀어진 거리감을 좁히고 마음을 열기 위함이 여행의 목적이었다. 남자들이란 밥도 같이 먹어보고 술도 밤새 마셔보고 함께 목욕탕에서 거리낄 게 없을 때 비로소 친해진다고 생각하는 정 감독. “욕심은 버리고 지더라도 같이 웃을 수 있는, 수고했다면서 서로의 땀을 닦아줄 수 있는 팀이 되도록 ‘소신껏’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뛰고 싶은’ KTF, 모토는 ‘대화와 화해’
올해 KTF 매직엔스가 내건 슬로건은 ‘뛰고 싶은’ KTF이다. 아마추어를 포함해 모든 선수들이 뛰고 싶고 그 중심에 KTF 선수단이 서 있는 것. 무엇보다 소속 선수들의 마음가짐도 중요하지만 그 외의 선수들조차 이 팀에서 활동하고 싶을 정도로 분위기 쇄신에 앞장설 계획이다. 이에 정 감독은 가장 첫 번째 실천계획으로 ‘친화력’을 손꼽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 아끼고 다독일 수 있도록 서로 노력할 생각입니다. 감독과 프론트, 선수 이 삼각 구도 안에서 오해와 감정이 쌓이다 보면 자연히 선수의 성적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 제 역할은 프론트의 입장과 선수의 입장을 최대한 반영해 합의점을 찾는 것이죠.”

‘호랑이 감독’, ‘빠따정’이라는 사나운 별명을 가진 정 감독의 이미지를 고려해볼 때 이와 같은 계획은 다소 ‘부드러운’ 계획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에게도 이에 따른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신년 팀 정비를 앞두고 2군제를 도입하겠다고 나선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잠재력을 갖춘 선수들의 수급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정 감독은 프론트를 대상으로 강력히 2군제 도입을 주장했다. 그에 따른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가는 것을 회사에서 모를 리 없지만 고심 끝에 승낙하고 말았다.

기존 선수들의 많은 경기 일정으로 도태된 분위기를 바꾸고 서로간의 경쟁심을 부추길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점을 들어 설득시킨 것. 이 역시 선수들과 상의 하에 이루어진 사안이다. “예전엔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해왔었죠. 당시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선수들의 프로의식이 전무후무했습니다. 이제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공인으로서의 행동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을 만큼 성숙해졌죠. ‘방망이’ 보다는 ‘악수’가 함께 커나가는 방법이 아닐까요.”

향후 ‘아마추어 팀 리더’로 변신 꾀할 터
꽉 짜여진 경기 일정으로 숙소에서 생활하다시피 해 한 달에 한 번 집에 가는 것도 힘들다는 정 감독에게도 7살 난 아들이 있다. 자주 볼 수 없는 미안함에 아들을 만나러 가는 시간에는 모든 것을 접어둘 정도로 애틋하다. “예전에는 제 직업을 설명할 길이 없어 그냥 아들이 다니는 유치원 ‘원장’선생님이라고 둘러댔어요. (웃음) 그러던 어느 날인가 아들한테 전화가 걸려 왔더라구요. 텔레비전에서 제가 나오는 것을 보고 게임단 감독이라는 사실을 알았답니다.”

그 후로는 아들에게 먼저 전화가 걸려와 경기 이것저것에 대한 질문을 쏟아낸단다. 한번은 아들과 함께 찜질방에 갔다가 실내 PC방에서 게임을 하자고 조르는 통에 애를 먹었다고. “아들이 게이머를 하겠다면 결코 말릴 생각은 없습니다. 프로게이머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또래 친구들이 많다고 하더군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제가 알고 있는 모든 노하우를 가지고 실력 있는 선수로 키워내고 싶은 욕심도 있지요.”

국내 최초 e스포츠 프로게임단 감독으로 발을 내딛은 지 횟수로 9년. 가장 밑바닥부터 e스포츠를 갈고 닦아온 그가 현재 가장 절실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역 선수들을 받쳐줄 다음 세대 선수들의 부재이다. e스포츠가 맨 처음 생겨날 수 있었던 원동력이 프로게이머가 아닌 아마추어 게이머들의 활성화라는 사실을 늘 유념하고 있기 때문. “언젠가 감독직을 그만 두게 되더라도 마무리는 꼭 아마추어 게임단 감독으로 남고 싶습니다. 학교를 그만두면서까지 프로게이머의 길을 꿈꾸는 청소년들을 위해 고교 e스포츠 선수권 대회 등 아마 팀을 전문적으로 육성하고 싶어요.”

분명 지도자의 길은 혼자서 싸워야 하는 외롭고 힘든 길이라는 것을 정 감독은 알고 있다. 갖은 질책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그의 의지가 아직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e스포츠의 감독이란 자리는 선수들이 만들어 준 것이죠. 제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전역한 선수들을 다시 불러들이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함께 고생해서 만들었던 시간에 대한 보상이라고 할까요?”

정 감독은 선수가 없으면 자신도 없다는 생각을 늘 가슴에 담고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키운 선수가 잘 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인 것. e스포츠 꿈의 양성소가 전국 방방곡곡에 생겨나는 그 날까지 ‘명장(名匠)’ 감독의 ‘손질’은 바쁘게 돌아간다.

사진=김은진 기자 | ejui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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