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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경로당이 바뀌고 있다'

  • 이석 프리랜서
  • 입력 2003.01.28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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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오후 4시 서울 광진구 구의2동 아차산 경로당. 이곳 3층의 ‘노인 정보화 교실’에서는 나이 지긋한 노인들을 상대로 컴퓨터 교육이 한창이다.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안의 분위기는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광진구청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노인 정보화 교실을 운영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교육은 하루 두시간 단위로 진행된다. 광진구청 민원정보과 강재규씨는 “우리나라도 점점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지만 노인들은 여전히 소외 계층으로 남아있는 게 현실이다”며 “이들에게 인터넷이란 신문명을 접하게 하는 게 교육의 목적이다”고 설명했다.

강의는 컴퓨터 기초 교육에 이어 인터넷 서핑으로 이어진다. 강사의 지시에 따라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연신 자판을 두드린다. 중국 영화의 취권 모양을 한 ‘독수리 타법’이긴 하지만 제법 자세가 잡혀있다. 아직 자판이 익숙하지 않은 듯 한자씩 자판을 두드리면서 구슬땀을 흘리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한쪽에서는 강사의 말을 이해 못한 듯 옆사람이 하는 것을 연신 힐끗거린다.

손녀에게 보낼 카드 메일을 만들고 있었다는 한면동(75) 할아버지는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컴퓨터의 ‘컴’자도 몰랐는데 이제는 손녀에게 이메일을 보내 안부를 교환할 정도로 익숙해졌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컴퓨터를 가르치고 있는 강사 채인석씨(30)에 따르면 교육을 받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평균 나이는 60세 이상이다. 80세에 다다른 할아버지 교육생도 있다. 예전 같은면 손자 재롱이나 구경하며 세월을 보낼 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이들의 열기는 웬만한 ‘우등생’ 못지 않다.

물론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다 보니 해프닝도 적지 않다. 처음에는 대부분이 용어를 이해하지 못해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일쑤다. 수업 진행이 어려울 정도. “마우스를 흔들어주세요”란 말에 실제 마우스를 들고 흔드는 웃지 못할 일도 있다.

채씨는 “가장 답답할 때가 한글을 모르는 교육생이 왔을 때다. 수업을 따라오지를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판 두드리는 것을 도와줬다가는 컴퓨터 교육은 물 건너간 것이다. 몇 달이 지난 후 이들이 컴퓨터 자판을 두드릴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노인들이 컴퓨터를 배우고 난 후의 가장 큰 변화는 자신감 회복이다. 종전까지만 해도 노인들은 ‘컴맹 세대’로 통했다. 컴퓨터나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은 계층이기 때문에 자식 뿐 아니라 손자들에게까지 설움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틈나는 대로 손자와 게임을 즐길 정도가 ‘마니아’가 됐다.

지난해 7월 처음 컴퓨터를 접했다는 이종칠(66) 할아버지는 “집에 들어가면 손자들을 모아놓고 게임을 하는 게 유일한 낙이다”며 “아이들의 입에서 ‘우리 할아버지 최고’라는 말이 나올 때 가장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이씨는 즉석에서 게임 사이트에 접속해 회원 가입을 한 후, 게임창을 띄우는 능숙함을 보였다. 간간이 “인터넷이 왜 이렇게 느리냐”며 애교 어린 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김양웅(63) 할아버지는 하루라도 컴퓨터를 켜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 ‘골수파’다. 지난해 10월부터 컴퓨터를 시작했는데 이제는 인터넷을 능숙하게 다룰 정도로 노련해졌다. 틈나는 대로 ‘벽돌 깨기’ 등의 보드 게임도 즐긴다. 김씨는 “일주일에 3∼4번 정도 인터넷에 접속하는데 2시간이 30분 같이 느껴질 정도로 재미있다”며 “정신 수양도 되는 것 같아 요즘은 컴퓨터를 끼고 산다”고 말했다.

이중에는 ‘게임 고수’들도 꽤 있다. 온라인 게임 ‘조선협객전(chosun.tomis.co.kr)’에서 ‘낭낭황후’라는 ID로 활동하고 있는 이영자씨(65)가 대표적인 예. 이씨는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게임에 심취해 있다. ‘전투력’도 최고 레벨인 1000에 거의 육박해 있다.

“애들이 ‘할머니가 무슨 게임이냐’고 말할 때가 가장 섭섭해요. 노인정에 가서 화투나 치라는 그런 투거든요. 그래도 요즘은 제 ID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게임 내에서 유명인사가 됐어요. 독수리 타법이지만 아이들과 채팅을 하며 고민도 들어준답니다.”

이렇듯 경로당 문화가 바뀌고 있다. 바둑이나 장기를 두며 소일거리를 찾던 ‘수동형’에서 채팅이나 게임을 즐기며 자신의 일을 찾는 ‘능동형’으로 진화하는 추세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문화가 실버산업을 부추기는 촉발제가 되기를 희망한다. 서울 노인복지센터의 한 관계자는 “일본의 경우 이미 ‘유락원’이란 이름의 노인 전용 게임 센터가 생길 정도로 실버 산업에 대한 관심이 많다”며 “우리나라도 이제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만큼 여기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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